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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욱 Jul 12. 2023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하나씩 벗겨 내는 것

「나인」 - 천선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담임 선생님은 방학 숙제로 아주 특별한 것을 내주셨다. “한 달 동안 식물 키워보기”라는 귀여운 문구와 함께 학급 인원수에 맞게 작은 허브 화분들을 사 온 것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허브의 냄새를 맡으며 잘 돌봐주리라 굳게 다짐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허브의 존재가 마냥 신기했다. 학교를 가며, 놀러 다니며 정말 많은 식물을 봐왔었지만, 내가 직접 키운 식물은 허브가 유일했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허브는 집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차지했고, 매일 물을 주고 그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너무 물을 자주 줘선 안 되고, 나중에 허브가 커지면 화분도 옮겨 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키만큼 커진 허브를 상상하며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부터 나는 허브의 존재를 서서히 잊기 시작했다. 허브라는 존재는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론, 물을 주고 햇빛에 가장 잘 드는 자리에 두어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진 않았다. 잎이 싱싱해진다던지, 좋은 향기가 난다던지 하는 것은 열한 살짜리 어린아이가 느끼기엔 너무 미비한 변화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허브는 점점 나에게서 잊혀졌다. 하루에 한 번 물을 주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삼일에 한 번으로 늘어나더니, 보다 못한 엄마가 가끔씩 물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것뿐이던가, 빨래를 위해서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양보해줘야 했고, 조금씩 조금씩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결국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자리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던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적응한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건, 버텨야 한다는 건, 존속한다는 건, 그러니까 끈질기게 존재한다는 건, 세계라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무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한다는 건 지킨다는 것이고 동시에 버린다는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버려야 하는 건 존재했던 모두 다.」

 나인 – 천선란      


 어느 순간부터 허브는 내 눈앞에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문득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무렵에, 나는 베란다 끄트머리에서 죽어있는 허브를 발견했다. 처음 생기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진 채로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가지를 만졌을 때의 그 차갑고 뻣뻣한 느낌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나는 엄마를 불러서 허브가 죽었다고 말했고, 엄마는 작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서 허브의 시체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그때 허브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브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허브는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이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방학이 끝나고 살아있는 허브를 들고 온 학생은 단 두 명뿐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허브가 죽어서 버렸거나, 아니면 어딨는지 찾지 못해서 들고 오지 못한 아이들 뿐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적잖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숙제의 의도는 아마도 생명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고 싶었던 거였겠지만, 돌아온 건 싸늘하게 죽어버린 허브의 시체뿐이었으니까 말이다. 허브를 잘 키워준 기념으로 선물까지 준비 했었던 상황이었으니,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음부턴 그러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허브를 열심히 돌봐준 아이들은 매우 억울해했고, 나는 허브를 죽였음에도 선물을 받아버려서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집에서 나팔꽃이라던지, 강낭콩, 고추 모종들을 키웠다. 대부분은 허브처럼 말라죽은 적은 없었고, 반대로 너무 잘 커버려서 산이라던지 마당에 식물들을 옮겨 심었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식물에 관해서 떠올릴 때면 내가 죽였던 허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허브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나에게 뭐라고 말했을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을 가까이서 봤을 때의 충격은 어떠한 말이나 감정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병에 걸려서, 불의의 사고로,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생명은 죽고 태어나는 것을 반복한다. 허브가 죽었을 때 나는 세상의 비밀을 한 개 알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나와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나인 - 천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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