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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y 22. 2024

나와 전~혀 맞지 않는 직장 동료,  남편과의 출장

2018년 07월, 그와의 첫 출장

[2018년 07월]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카메라 감독. 영어 한 마디도 못하지만 손짓발짓만으로 해외에서 4박 5일 살아남기가 가능한 기능인.


2018년 07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 현우 감독과 해외 출장을 갔다. 일에서 연애, 연애에서 결혼까지 성공한 모든 (전)사내 부부는 공감할 것이다. 내 연인이 되기 전, 동료로 본 배우자의 모습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 존경스럽지만은(?) 않다는 걸.


동료였던 현우 감독을 잠시 회고해 본다.

아, 그때나 지금이나 한 없이 속 편하고 참 해맑다. 동료가 아니라 내 선배나 후배였으면 어땠을까? 단 몇 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정도면 동료로 만난 것이 천만다행인 걸까?


18년도 여름, 현우 감독과 처음으로 같이 4박 5일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촬영 현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농담을 나누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여하튼 그와 함께하는 첫 해외출장 명단을 보아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현우 감독과 나. 그리고 연세 지긋하신 피디A, 까칠한 카메라 감독B, 까탈스러운 작가C. A, B, C 세 사람은 현우 감독과 나보다 나이도, 연차도 많았다. 모시고 가야 할 사람 천지인 출장. 출발부터 행복할 리가 없다.


사건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후배 작가의 실수로 현우 감독의 항공편 영문이름이 잘못 입력돼 있었다. A, B, C 선배들과는 게이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터라 발권 창구에 있는 건 나와 현우 감독 둘 뿐. 나는 땀이 삐질삐질 났다. 작가팀의 실수로 감독이 출장에 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지. 반대편 서비스 창구까지 몇 번을 뛰어다니며 내 선에서 이 일을 해결하려 애썼다. 현우 감독은 이런 날 보면서 ‘괜찮아 괜찮아’라며 여유를 부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다행히 일은 마무리되어 우리는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까탈스러운 C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누가 잘못한 거야?’라고 따져 물었다. 현우 감독으로부터 전화로 상황을 전해 들은 까칠한 B감독이 내 선배에게 이른 것이다. 지금에 와선 미안하지만 난 그때 현우 감독에게 탓을 돌렸다. “현우 감독님이 처음부터 스펠링을 잘못 보내줬어요”라며.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쉽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최소의 제작비로 최대의 결과물을 뽑아내야 했으니 아주 험난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 까지 촬영을 반복하길 며칠 째. 맥도널드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출장 마지막 날. 일을 조금 일찍 마친 우리를 코디네이터가 한식당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그동안의 한을 풀 듯 김치찌개와 소주를 무아지경으로 퍼먹었다. 그때 또 현우 감독이 말을 걸었다.

“그거 안 먹음 나줘”


아니? 며칠 동안 햄버거에 찌든 건 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이 김치찌개가 고프다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찌개를 현우 감독 앞에 놓았다. 현우 감독은 찌개를 놓자마자 그릇을 다 비워버렸다. 나는 기꺼이 먹지 않던 반찬까지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는 연신 감동한 듯 엄지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현우 감독은 그 자리에서 밥 세 공기를 비운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전쟁과도 같았던 식사가 끝난 뒤, 현지 코디네이터는 우리를 카지노로 안내했다. 몇 시간 되지 않는 자유 시간을 즐길 생각에 들뜬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 감독은 카지노 안에서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게임의 룰을 물었다. 귀찮아진 나는 전에 여행으로 몇 번 카지노를 와본 기억을 되짚어 간단한 게임 몇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삥을 뜯는 게 아닌가?

“10달러만 빌려줘”

나는 결국 현우 감독에게 10달러를 주고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표정하게 룰렛을 돌리고 있는데 어느새 또 현우 감독이 곁으로 왔다.


“아니 거기 말고 저기 걸어야지.”

“내가 알아서 할게.”

나도 마치 동네 불X친구를 대하듯이 반말로 대꾸했다.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하던 현우 감독은 갑자기 내 구슬을 옆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응원했다. 그의 응원 때문이었을까. 나는 소액의 성과를 이룬 후 다른 게임들을 했다. 그때마다 현우 감독은 나를 따라다니며 곁눈질로 게임을 배우곤 자기도 게임에 나섰다. 게임하는 내내 졸졸 따라다니는 현우 감독이 귀찮게만 느껴졌는데, 나는 어느새 게임 판에서 그의 행운을 응원하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밤을 지새운 후, 다음 날 아침 우린 짧지만 기일~게 느껴졌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온 후 현우 감독은 내게 바로 연락을 해 현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한참 사진을 보내주고 있는데 어딘가 따갑다. 아, L선배였다. 현우 감독을 열열이 사랑하는 그녀를 잊고 있었다. 나는 괜히 양심에 찔렸다. 그와 몇 개의 메시지를 나눈 것만으로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현우 감독과 거리 두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친구가 되자마자 다시 AI처럼 구는 내게 현우 감독은 의아해했지만, 나는 출근해 있는 내내 L선배에게 시달리는 것 대신 친구(?) 한 명 잃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질 수도 있었다. (아쉽)


현우 감독과 나는 7년 전 그때 이후 한 번도 같은 프로그램에서 만난 적이 없다가, 최근 몇 년 전 다시 같은 프로를 만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남에 따라 각자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고, 촬영 현장에서 하는 일도 많이 달라졌지만... (반전)그때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본 현우 감독은 참으로 속 편한(?) 사람이었다. 성질 급한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나의 동료이자 남편. 연인이 아닌 남편과 한 곳에서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때문인지 그와 함께 일을 하는 내내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절대 절대 절대 안 새게 해 주세요!!!


☑ 남편과의 첫 출장: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나름(?) 의지가 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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