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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03. 2024

비밀리에 시작한 사내연애,  한 달 만에 들켰습니다.

2019년 2월, 연애 한 달 차

[2019년 2월]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1990년생. 카메라 감독. 늘 예상치 못한 일을 팡팡 터뜨리는 진정한 이벤트(?) 가이.


남편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를 놀라게 한다. 가령 무료 이벤트에 응모한다더니, 50만 원짜리 뮤지컬 정기 구독 상품에 가입하지 않나. 언제는 먹고 싶은 과자를 조금 사겠다더니, 5kg짜리 뻥튀기를 주문해 택배기사가 에어컨만 한 뻥튀기 상자를 들고 오게 하지 않나.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사고뭉치다. 뭐 때론 (금은보화를 좋아한다고 하도 주입시킨 덕분에) 나를 위해 깜짝 선물로 목걸이나 팔찌 등을 사 오기도 해서 좋긴 하지만. 이렇듯 그는 후진 따윈 모르는 노빠꾸(?) 직진남이기 때문에, 고민이란 것을 오래 하지 않는다. 그 탓일까. 비밀연애를 시작한 지 이주 만에 그는 커플링을 들고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아 제발. 천천히! 브레이크! 브레이크!!


비밀연애를 시작한 우리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함께하는 현장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조차 하지 않으며 공과 사를 아주 철두철미하게 구분하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다. 흔히들 사내연애는 회사 복사기까지 알고 있는데, 연기하는 둘을 위해 모두가 모른 척해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말 복사기까지 속였다. 그와 나는 촬영장에서는 뜻하지 않게 남(?)이 되어야 했기에, 촬영 전후로 열심히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홍대나 합정 같은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날 까봐 얼굴을 푹 숙이고 다니며 마치 디스패치에 걸릴까 봐 숨어 다니는 톱스타들처럼 그렇게 신중을 기해 데이트를 했다. 일주일, 이주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보안에 힘을 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만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때때로 소개팅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007 작전을 펼친 지 이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촬영을 마친 후 집으로 흩어졌다가 밤늦게 현우 감독을 다시 만났다. 동네 산책을 하는데 그가 어딘가 우물쭈물거리다 입을 뗀다. “아니, 우리 사이를 너무 숨기니까. 서로 불안하잖아. 그래서 서로에게 어떻게 확신을 주면 될까 생각해 봤어.” 엥? 우리는 분명 비밀연애를 하기로 합의보지 않았던가? 그놈의 ‘확신’이란 단어 때문에 어리둥절해있을 때 다시 소녀처럼 수줍은 그가 내 손을 잡아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 아닌가. 설마? 역시나 그에게 망설임이란 없다. 현우 감독의 손에 들려있는 건 반지였다. 그간 연애를 하며 몇 번의 커플링을 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사귄 지 이주 만에 ‘확신’을 주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놀라 어버버 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는 차분하게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절대 빼지 말자”란 말을 덧붙이며. 당최 그는 무슨 생각인지.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우리가 반지를 끼고 현장에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결국 우린 긴 대화 끝에(사실 나의 설득에 가깝다) 극적으로 현우 감독만 매일 반지를 끼는 것으로, 나는 일터를 제외한 곳에서 끼는 것으로 타결을 봤다.


집에 돌아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있자니, 새삼 그와 연애를 하는 것이 실감 났다. 사실 모두를 속인다고 현우 감독과 남 인척 연기를 하는 것이 우리 두 사람에게 또한 좋은 영향을 미칠 리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촬영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로를 돌멩이 보듯 보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만나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요령에 재주 없는 현우 감독은 종종 내게 “너무 낯설어. 지금은 여자 친구 모드인거지?”를 재차 확인하곤 했다.


하늘이 이런 그를 가여워했을까. 결국 우리의 비밀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목격자가 생겨버린 것이다. 비밀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촬영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현우 감독이 잠깐 얼굴을 보자고 전화를 했다. 나는 얼굴을 재정비하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그때 집이 너무 멀어 사무실에서 숙식하곤 했다.) 그때 저 멀리 피로를 씻어낸 현우 감독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반나절을 남처럼 지내다가 봉인 해제(?)가 된 우리는 여느 풋풋한 커플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혀가 반토막 난 채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힘들었던 하루를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현우야..”


아. 왠지 낯익은 목소리. 우린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현우 감독의 바로 위 K선배였다. 뻣뻣하게 굳은 나와 현우 감독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우리 뒤에는 K선배가 서 있었다. 우리보다 더 놀란 표정을 하고.


“작가님이... 여기 왜?”

-“안... 안녕하세요.”

“둘이... 사귀어요?”

현우 감독과 꼭 맞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아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입이 떡 벌어진 채로 우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이 “괜찮아요. 비밀 지켜줄게요.”라는 말을 남기곤 슬쩍 웃으며 떠났다. 비상이었다. 아닌 밤중에 벼락이 쏟아졌다. 머릿속이 새카매져 발을 동동 구르는 내 옆에서 현우 감독이 씨익 웃는다. “괜찮아. 언제까지 속일 순 없잖아.” 속 편한 인간. 지금 당장에 K선배랑 현우 감독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결국 우리는 비밀리에 사내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제1호, 목격자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은 당시 내 장단에 맞춰 연기하는 척은 했지만, 딱히 우리의 관계를 숨기려고 크게 노력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빨리 탄로가 나길 바랐던 것 같기도. 이 글을 쓰다 보니 7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의심이 샘솟는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어찌 그리 속 편한 소릴 할 수 있었는지, 퇴근 후 돌아온 그에게 꼭 물어봐야겠다.


여하튼 남편은 여전히 저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해대서 나에게 혼쭐이 나곤 한다. 나는 수십, 수백 번 고민을 하고 신중히 결정을 하려는데 옆에서 헛소리를 핑핑해대니. 승질이 안 날 수가 없다. 참 복잡하게 사는 나완 달리 인생 참 편하게, 단순하게 사는 그. 답답해 속이 터져버릴 것 같다가도 어찌 보면 스트레스받지 않고 태평하게 구는 그가 가끔 부럽기도 하다. 이쯤 되니 허허실실 바보 같은 그가 사실 나보다 내공이 강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의 잔소리 폭격을 듣고도 늘 콧노래를 흥얼거리겠지. (그리고 또 한 번 혼이 나긴 한다.)


☑ 남편과의 연애 한 달 차: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사건 사고(?)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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