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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리 Oct 27. 2024

결정적 순간을 만든 영화와 글쓰기

살아가면서 결정적 순간, 핵심 신념이 바뀌는 경험은 혼란스럽고 신비롭다. 여러 번의 결정적 순간이 삶을 흔들었다.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통해 찾아왔는데, 영화 속의 잎싹처럼 나도 경계를 넘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양계장 안에 갇혀 알만 낳던 암탉 잎싹이 마당에 나가기를 꿈꾸듯 나의 해방구는 글쓰기였다. 해방구를 찾은 글쓰기는 신문의 영화칼럼으로 영역을 넓혔고, 무의식 깊이 숨죽인 '세상을 향한 말하기' 욕망을 끄집어냈다.


여성영화제와 책에서 만난 페미니즘

영화로 얽힌 삶은 또 다른 결정적 순간인 ‘페미니즘’으로 익숙한 언어와 삶에 질문을 던졌다. 인생에 불어올 거대한 지진과 후폭풍을 모른 채 지인이 소개한 여성영화제에 발을 들였다.


처음 접한 여성주의영화는 “달라질 수 있어요. 100년간 끊임없이 싸워온 여성들 덕분이죠.”라며 스위스 여성참정권을 재기 발랄하게 담은 <거룩한 분노(2016)>,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라며 불평등한 세상을 법으로 바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2018)>, “역사를 쓰는 건 펜을 쥔 자”라는 <콜레트(2018)>였다. 슬픔과 자책, 분노로 평온한 삶이 붕괴되었다. 역사와 사회에 실재하는데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을 인식한 혼란이었다.


“모든 관계가 권력관계”라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2013)>, “건강한 여성은 늑대와 아주 비슷해서 활력이 있고, 힘과 생기가 넘친다. 자기 영역을 잘 지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북돋우며, 창의적이고 충직하다”는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1992)>,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1983)> 책은 남성중심의 언어와 행동을 수행해 왔다는 충격과 여성의 목소리를 재발견한 환희를 동시에 안겼다.


페미니즘의 수혜를 제대로 받은 나는 자기 언어와 목소리가 없는 여성들에게 언어와 목소리를 찾도록 돕고 싶었다. 1인연구소 여성말글삶연구소를 만들고, 여걸의 눈으로 말하고 쓰고 성장하자는 온라인 창작커뮤니티, 다음카페 “여성말글삶연구소”도 개설했다. 지워지고 잃어버린 여걸의 목소리를 회복하고, ‘글’이라는 마이크로 세상에 당당히 말하는 창작동료들을 다음카페 여성말글삶연구소에서 기다린다.


비건 지향의 기쁨과 슬픔

아버지 식성을 따라 차려진 밥상을 먹고 성장해 육식과 해물 식탁을 바꾸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핵심신념이 바뀐 결정적 세 번째 순간은 비건 창작자를 만나고 동물해방 글을 쓰면서다. 내가 만난 완벽한 비건 창작자는 벌레도 생명으로 존중했다. 비건을 지향하다가 육식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던 삶에 ‘아름다운 비건주의자’가 제동을 걸었다.


비거니즘 잡지 「물결」 전권과 비건 셰프와 철학자의 책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영화가 삶을 바꿨다. 지구가열화의 주범인 목축업과 낙농업, 그 배후인 의약산업의 이윤추구를 고발한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2017)>, 호주에서 사육하고 도살하는 가축들의 생애를 숨김없이 보여준 <도미니언(Dominion), 2018>, 기후재난의 가장 큰 원인이 축산업이라는 <카우스피라시(2014)>, “단백질=고기=근육”이라는 편견을 깬 <더 게임 체인저스(2018)> 등의 영화를 통해 도돌이표 육식 습관을 멈췄다. 비거니즘은 인간중심주의가 잘못됐고,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동등하다는 자각을 일깨웠다.


탄소발자국이 제일 크다는 소부터 시작해 육식을 끊고 동물복지달걀을 먹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못 바꾼 습관은 해양생물 식용이었다. 해양생물 역시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존재라는 감각은 환경단체 활동가를 통해 배웠고, 공장식 어업과 어망, 선박 등의 쓰레기가 해양오염의 주범임을 고발한 영화 <씨스피라시>가 해양생물 식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해양생물 식용과 작별한 공헌은 <나의 문어선생님(2020)>께 돌리고 싶다. 아름다운 영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화감독과 문어와의 교감을 담은 이 영화는 ‘아름다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진실을 가르쳤다.


하지만 비건 지향인으로 산다는 것은 육식위주로 변한 한국음식문화의 반대편에 서는 일이며, 육식과 해물을 즐기는 지인들과 소원해지는 것도 각오해야하는 중대한 결정이다. 2년 가까이 비건 지향인으로 살지만, 가끔 뇌에 균열이 생긴다. 오랜 닭 식용습관 탓인지 아주 가끔, 교촌치킨의 허니콤보가 생각난다.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간헐적 육식은 안 될까? 허니콤보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가만히 한 문장을 떠올려본다. "완벽한 비건 한 명보다 어설픈 비건 지향인 열 명이 낫다".

비건 지향인들 사이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이 나를 위로하는 밤이다.        






*커버사진 출처: 아주경제신문, "[사진의 발견]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과 결정적 비밀" 이상국 논설실장,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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