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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은 루러우판입니다.

[타이베이, 점심 <2>] 대만 음식문화 상징하는 국민음식 중 하나

by KHGXING

오늘 햇살이 뜨겁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가을이 제대로 오진 않았습니다.


대만의 여름, 다들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한국에서 출장 온 어느 후배는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물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전형적인 대만 여름 느낌일 터이지요.


그래도 올 여름은 평년에 비해 그렇게 습하지는 않은 듯해요. ‘물속을 걷느라’ 척척 달라붙기 보다는 햇살만 내리쬐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날 좋습니다.


햇살이 따갑더라도 점심은 먹어야겠지요. 기다리는 시간인데 나가야지요. 식당으로 향하는 건널목에서 신호 기다리느라 서 있는 동안 바라본 하늘 모습은 그 햇살을 받아 구름 한 점이 참 예쁩니다.


식당이 멀진 않지만 평소 가던 곳들보다는 조금 더 걸어가야 합니다. 1km 정도 떨어져 있어 10여분 걷습니다. 대만 인도길에는 건물에서 이어져 있는 차양막이 있어 좋습니다.


오늘 점심 메뉴로 고른 음식은 루러우판(滷肉飯)입니다. 대만 사람들이 해외여행 갔다 돌아오면 먹고 싶다고 꼽은 음식 가운데 하나이지요. ‘다진 돼지고기조림 덮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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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민음식 루러우판


대만 사람들이 국민음식 가운데 하나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음식이지요. 그만큼 대만만의 독특한 음식인 것 같습니다. 물론 푸젠 등 중국 남부나 홍콩 등지에는 유사한 게 있을 거에요. 대만 사람들이 중국 남부에서 넘어 왔으니까요. 하지만 베이징 등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루러우판은 ‘다진 돼지고기조림 덮밥’이에요. 이미 음식 명칭에 어떤 음식인지 다 드러나 있어요. 한국어 발음으로 ‘로/노’인 ‘滷’란 글자의 뜻은 ‘소금밭’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어에서는 ‘조림하다, 졸이다’란 의미로 쓰이고 루러우(滷肉)는 조림고기, 보통 간장 베이스의 국물로 졸인 고기가 되는 것이죠.


조림 국물은 보통 간장과 팔각, 계피 등의 오향, 맛술, 설탕 등을 섞어 만듭니다. 거기에 깍둑 썰은 삼겹살 등의 돼지고기를 넣어 오랜 시간 졸여 고기에 국물이 푹 배는 것이 중요하죠. 그럼 고기도 부드럽고 조림향도 풍성합니다.


밥은 보통 흰쌀밥을 이용하지요. 대만 쌀도 꽤 맛있습니다. 쌀밥 위에 그 조림고기를 올려서 완성합니다. 이게 가장 기본이고 식당마다 약간의 변주를 하지요. 청경채를 올리거나 완숙 계란을 반개 올려 내오기도 합니다.


저는 루러우판을 먹을 때 처음에는 비비지 않고 밥과 조림고기를 그대로 한 술 떠서 먹습니다. 그게 그렇게도 맛나요. 아직 밥에 다 스며들지 않은 조림 국물과 고기가 입안에서 따로 놀지만 입 안에서 섞이는 맛이 일품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벼서 먹고요. 껍질과 지방, 살코기가 입안에서 섞이며 풍부한 콜라겐의 고소함이 가득합니다.


이게 어찌 보면 우리 계란간장밥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조림고기가 계란으로만 바뀐 것이죠.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것이 계란간장밥이었습니다. 반숙 계란을 갓 한 밥 위에 올리고 간장을 살짝 붓고는 비벼 먹는 정말 초간단 음식이죠. 제가 워낙 좋아하니 어머니가 수시로 해주기도 하셨고 워낙 간단하니 제가 직접 해먹기도 했습니다.


계란간장밥을 먹을 때도 처음부터 바로 비비지 않고 밥 위에 반숙 노른자만 살짝 묻혀 먹곤 했습니다. 노른자의 찐한 향이 밥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줬어요. 그리고 간혹 반숙 계란이 아니라 그냥 생달걀을 넣어서 먹기도 했습니다. 생달걀간장밥도 그것대로 일품입니다.


다시 루러우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국민음식이라니 그 역사와 기원이 궁금하네요. 하지만 대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우리도 너무나 일반적인 음식, 예를 들어 김치, 불고기, 간장게장 등의 역사와 기원을 물어보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줄 수 없잖아요. 일상의 음식이기에 더욱 모를 것 같습니다.


다만 다들 하는 이야기는 대만의 대표적인 서민음식이고 아마 50년대부터 본격화하지 않았겠냐 이야기합니다.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옮겨왔던 1949년 천대 이후 대만 사회는 혼란스럽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일반 서민의 삶은 팍팍했을 터이고요.


그럴 때 루러우판이 등장했다고 이해하고들 있습니다.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을 지낼 때, 먹을거리도 풍성하지 않을 때 한 끼를 후딱 때우고 그나마 영양분도 보충하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졸여 흰밥위에 올려 먹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루러우판에 올라가는 조림 돼지고기야 그래도 어느 정도 양질의 돼지고기겠지만 당시 조림에 사용한 돼지고기야 그렇겠습니까. 각종 고기 찌끄래기를 사용했을 거랍니다. 루러우판은 본래 가난한 가정의 소박한 한 그릇이었던 셈이죠.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대만 포털 사이트와 챗지피티의 힘을 빌려 확인해 봤습니다. 설명이 보다 거창하네요. 그 역사가 대만 초기 농업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거에요. 당시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고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왔기에 그 한 종류가 루러우판일 거라네요.


그러면서 핵심은 간장조림(루웨이, 滷味) 맛인데 그것의 기원은 중국의 푸젠과 광둥 등지와 밀접히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 물결과 함께 그 지역의 식문화가 대만으로 스며들어 왔는데 ‘루웨이’는 그렇게 대만으로 퍼졌답니다.


대만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일제 강점을 당했습니다. 그 강점기에 조림 방식에 일본 스타일이 약간 가미됐다고 합니다. 그 즈음 많은 대만인들이 루러우판을 집밥처럼 여기기 시작했고 곳곳의 노점과 식당에서 널리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다른 자료에서는 루러우판이 일제시대 이후 전후 기간 생겨났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중국 청대와 일제시대 대만어 사전을 보면 간장으로 졸인 돼지고기를 뜻하는 루러우(滷肉)는 있지만 루러우판(滷肉飯)이라는 단어는 없었고 관련 문헌 기록도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추정하네요. 어떤 설명이던지 일제시대와 전후 시기 즈음 생겨난 것 같긴 합니다.


‘대만 음식문화를 상징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인 루러우판은 그럼 어디서 먹어야 하나요? 집에서 직접 해먹기도 하겠지만 식당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가장 유명한 체인점은 ‘후쉬장(鬍鬚張, Formosa Chang)’입니다. 너무 단적으로 말씀드리나요. 하지만 대만사람들에게 루러우판 식당 체인 하나 추천해 달라 하면 첫 번째로는 다 이 식당이에요.


1960년 타이베이에서 노점으로 시작한 식당이랍니다. 현재는 대만 전역에 70여개 이상의 직영점이 있고요. 대만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한 회사 후배는 루러우판의 맛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식당이 여기랍니다. 후쉬장보다 맛있으면 맛있는 식당이고 맛없으면 별로인 식당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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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러우판 전문 체인점 후쉬장(鬍鬚張, Formosa Chang)


제가 찾아간 후쉬장 체인점은 타이베이 의과대학 지점입니다. 사무실에서 우싱제 골목을 따라 쭉 걸어가면 우싱 재래전통시장이 나옵니다. 그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입구와 간판이 꽤 고풍스럽습니다. 12시 전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4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루러우판과 돼지족발, 다진마늘 고기무침(쏸니바이러우, 蒜泥白肉), 돼지내장약재탕(웬쫑스션탕, 原盅四神湯). 아 주문하고 나서 보니 완전 제 스타일로 해버렸네요. 고기만 잔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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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쉬장의 점심(루러우판과 그 고기요리 친구들)


결과 먼저 말씀드리면 루러우판을 얘기하며 왜 후쉬장, 후쉬장 하는지 알겠습니다. 맛의 기준이 될 만합니다. 간장조림 향이 훌륭합니다. 제가 주문한 것은 정말 가장 기본적인 루러우판이고 그 위에 계란과 청경채, 돈가스 등이 올라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다만 후쉬장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주연도 주연이지만 조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돼지족발, 다진마늘 고기무침, 돼지내장약재탕 모두 제 마음에 쏙입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고기냄새 진동할 듯하지만 돼지족발은 야들야들하고, 다진마늘 고기무침은 마늘향이 짙게 배어 전혀 느끼하지 않습니다. 돼지내장약재탕은 이름은 무지막지하지만 내장은 쫄길쫄깃하고 탕향은 향기롭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루러우판이 조연이고 이들 세 가지 음식이 주연일 겁니다.


기분 좋게 점심 먹고 나옵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음식점 이름입니다. 이상하네요. 제가 아는 루러우판 한자가 아닙니다. 루러우판 중국어는 滷肉飯인데, 루러우판 대표 체인점 이름의 루러우판 중국어가 魯肉飯입니다! 아니 글자가 틀리다니요.


루러우판 중국어.jpg 후쉬장 식당안의 루러우판 중국어(滷肉飯이 아니라 魯肉飯이다)


발음은 똑같습니다. 滷와 魯 모두 ‘루’입니다. 알고 보니 루러우판의 중국어 표현이 2가지입니다. 원래는 滷肉飯이 맞지만 魯肉飯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확한 명칭이 滷肉飯이니 이것만 사용하자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魯肉飯도 사용하는데 크게 개의치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사용하다 보니 글로벌 미식 평가 가이드북인 ‘미쉐린 가이드’에서는 대만 루러우판을 설명하며 중국 산동성에서 기원한 요리라고 설명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魯肉飯의 ‘魯’는 산동성을 의미하는 글자이기 때문이지요.


하여간 우육면과 마찬가지로 루러우판도 대만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루러우판 식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오늘 ‘나만의 루러우판’이 생긴 것 같아 기분 좋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언제 마냥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오늘 더욱 맛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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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후 돌아오는 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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