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소소한 일상]
그런 순간이 다들 있지 않나요? 얘기 나누다 생각지 못한 말을 불현듯 들었는데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는 순간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애매한 미소만 머금은 순간이요. 다행히 사랑스러워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얼마 전 일요일 오후로 기억합니다.
대만 살이가 2년 반 가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말인 즉, 이제 귀국 시점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해외 주재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돌아가면 한국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 아내와 딸아이와 가볍게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서울일지, 인천일지, 경기도일지, 강원도일지 꺼내봅니다. 경우의 수가 너무 다양하죠. 그만큼 불확실한 것들이 아직도 많다는 의미겠지요. 서울이라 하더라도 북쪽일지, 동쪽일지, 남쪽일지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정말 확정돼 있는 게 하나도 없네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이 학교가 가장 중요한 변수인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 학교를 6년 다녔지만 대학은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입시제도는 정말 다양하더군요. 그에 따라 저희의 내년 보금자리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다만 얘기 나누다 보니 한 가지는 좁혀지더군요. 현실적으로 주말부부를 할 수밖에 없다는, 아이와 아내가 함께 지내고 주말에 제가 합류하는 그림이죠. 직장이 강원도에 있다 보니 그러합니다.
주말부부에 대한 별 감흥은 없습니다. 이미 경험치가 쌓여 있으니까요. ‘좋다 싫다’가 아니라 ‘하니까 해야지 머’ 이런 느낌입니다.
그때였죠. 아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불쑥 아이가 끼어듭니다. “왜 주말부부를 해? 결혼했으면 같이 살아야지.” “아 그래? 결혼했으면 같이 살아야 하는 거구나” 웃음이 픽 나오면서도 아이의 반응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일곱 살 때도 주말부부 경험이 있습니다. 육아휴직 1년 동안 아이와 신나게 시간 보낸 뒤 복직한 해였습니다. 공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회사가 지방이전을 했는지라 어쩔 수 없이 주중엔 지방에 있고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는 생활을 1년 했죠.
간단히 짐을 싸서 내려가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꽤 생생합니다. 연말이었을 거에요. 당시 교육을 다녀온 친한 선배도 복직을 했고 집도 근처여서 함께 지방의 회사 인근으로 이사를 했죠. 남자 둘 세간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어서 작은 트럭을 빌려 짐을 실어 내려갔습니다.
아이와 아내가 아파트 입구에서 배웅했습니다. 아빠가 트럭을 타고 손을 흔듭니다. 아이에게 다음 주말에 올라올게 했지만 아이 딴엔 많이 어리둥절했나 봅니다. 아빠가 어디 가지? 주중에 나랑 놀아줬는데 왜 이제 주중에 없지? 그런 표정입니다. 그러곤 ‘우앙’이네요. “아빠 어디가?” 꽤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습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나 봅니다. 그때 그렇게 슬펐어? 하고 농치며 물어보면 어깨 으쓱입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며.
일요일 오후가 나른했나 봅니다. 내년에 어디에서 살지 얘기하다 이런저런 얘기도 덧붙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그럽니다. “난 결혼 꼭 할 거야.”
“뭔 결혼이야, 그냥 아빠랑 살자.” 아내가 시답잖은 소리 한다고 눈을 흘깁니다. 하지만 전 진반 농반 얘깁니다. 이 녀석과 오래 지내고 싶은 마음, 많은 아빠가 다 그러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이가 단호하네요. “아냐 할거야.”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나 봐요.
여느 부부처럼 저와 아내는 “어휴 결혼이 뭐가 좋다고” 이구동성이죠. 자연스레 진부한 농담 순번인 ‘다음 생애에는?’, ‘다음 생애에도?’ 주제도 등장합니다.
그때였죠. 아이가 다시 불쑥 끼어드네요. “다음 생애 얘기하니 슬퍼, 엄마 아빠도 못보고. 다음 생애에도 엄아 아빠 할 거야.” 무어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찌 사랑스럽지 않은 말이겠습니까.
다만 이 녀석의 ‘감동적인’ 멘트는 어쩌면 아빠 활용법 100%를 알기에 그런 게 아닌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나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줘야 하니 다음 생애에도 아빠해 줘’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빠 활용법 100%’ 내심 저도 행복하죠.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이 녀석은 아빠 퇴근을 기다립니다. 왜냐고요. 물론 아빠가 보고 싶어서겠지요. 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말은 안하렵니다. 잠들기 전 아빠의 안마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하루가 루틴하게 돌아간다면, 제가 아이 잠들기 전에 집에 도착한다면 하는 일과가 있습니다. ‘등 마사지’입니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큰 소리가 납니다. “아빠!” 저는 느긋하게 갑니다. 녀석이 조급해 하는 모습이 재밌잖아요. “빨리 와!”
아이는 마루나 침대에 엎드려 있습니다. 등 마사지 하라는 신호죠. 짐짓 투정부리며 넌 아빠를 왜 이리 부려먹냐 하지만 저도 이 시간이 좋습니다. 등 마사지를 해주며 녀석과 이 얘기 저 얘기 하고 농담도 합니다. 이 녀석의 웃음 코드를 잘 알기에 툭하면 웃음보가 터져서 마사지를 멈춰야 합니다.
안마가 길진 않습니다. 길어야 10분 정도 하는 거 같아요. 마무리는 스트레칭입니다. 뚜둑 하고 관절과 근육을 푼 뒤 시원하다, 만족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곤 서로 하이파이브하고 마무리. 정확하게 손바닥이 맞으면 서로 오호 하고 눈짓합니다. 아내가 한소리 합니다. “빨리 자. 몇 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불 끄고 나옵니다.
주말 오후에 이렇게 글을 끌적이고 있다니 이번 주말엔 다른 주말과는 좀 다르네요. 지금은 무슨 주말이냐고요? 주말부부도 아니고 다음 생애도 아닙니다. 그저 3주간 혼자 지내는 시간입니다.
아이와 아내가 방학 기간 잠시 한국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일주일 지났습니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이 시간 또한 좋네요. 간사한 마음이네요. 어느 시간이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