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당탕탕 ‘닥공’ 여행 오랜만이네요

[대만 소소한 일상] 세탁기 멈춘 뒤 기차타고 다녀온 타이둥 열기구축제

by KHGXING

정말 우당탕탕 입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닥공’ 여행을 떠나네요.


주말 아침이면 테니스를 칩니다. 하지만 가벼운 햄스트링과 무릎 부상에 2주째 쉬고 있습니다. 차분한 주말을 보낼 요량이었습니다. 다리도 아직 온전히 성하지 않기에 집에서 밀린 청소도 하면서 아내와 아이의 ‘귀환’을 맞이할 셈이었지요. 다음 주면 3주간 집을 비웠던 아내와 아이가 돌아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은 혼자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네요.


주말인데도 6시에 눈을 뜹니다. 습관입니다. 유산소 운동은 하지 못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근력운동 하러 단지 안 자그마한 피트니스센터에 내려갑니다. 샤워까지 하고 8시 반경 올라옵니다.


이제 일주일 밀려 있는 빨래를 할 시간입니다. 땀에 쪄든 빨랫감은 식초를 약간 넣고 삶습니다. 아내 방식인데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곤 모든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에 넣고 돌리기 시작합니다. 1시간 50분 정도 걸린다니 11시는 되어야겠네요.


방마다 제습기도 돌리고 노트북을 켭니다. 사과도 하나 냉장고에서 꺼내 먹습니다. 아내가 집을 비우며 사과를 십여 개 씻어 넣어 놨습니다. 이번 사과 달고 맛있네요.


이때였습니다. “이번 주말 정말 이렇게 보내는 거야?” 라고 제가 제게 묻네요. “응, 차분히 보내자” 답합니다.


“타이둥 열기구축제는?”

“못가지 머, 새벽에 하는데 이미 늦었잖아”

“그거 저녁에도 하는데?”

노트북으로 타이둥 열기구 축제 검색에 들어갑니다.


대만에서 하고 보고 싶은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타이둥 열기구 축제입니다. 하지만 2년 반 지내다 보니 버킷 리스트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다 지난주 다른 기업 주재원과 점심을 먹으며 지난해 열기구 축제 다녀온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시 버킷 리스트가 또렷해지는 순간이었죠.


주말에 떠나볼까. 하지만 막상 가려니 이것저것 할 일이 눈에 밟히네요. 빨래까지 돌리고 있자니 결국 안 가겠구나 싶었지요. 그러다 저렇게 자문자답하다 다시 동하게 된 것이죠.


저녁 축제 시간은 5시부터 네요. 저녁에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새벽 5시 반부터 하는 아침 축제만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간 9시 반. 서둘러 대만 기차 앱을 다운받아 확인하니 열기구축제를 하는 타이둥 루예(鹿野)역까지 바로 가는, 10시 반에 타이베이역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습니다. 10시 20분까지 도착해야 하니 지하철로 가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9시 50분엔 택시를 타자 생각하고 준비를 시작합니다. 20분 남았습니다.


반바지, 반팔, 텀블러, 썬글라스, 썬크림, 지갑, 작은 매트, 노트북, 충전선, 우산, 이어폰, 핸드폰, 집열쇠. 딱 여기까지입니다. 옷은 입고, 소지품은 배낭에 우겨넣습니다. 각 방 불 다 끄고 제습기 전원 끄고 돌고 있는 세탁기 전원 종료 버튼 그냥 누릅니다.(내일 다시 빨지요 머) 우버로 택시를 부르니 2분 후 도착이랍니다. 바로 내려가 9시 53분에 택시 탑니다.


10시 15분에 타이베이역에 도착했습니다. 매표소로 서둘러 갑니다. 10시 31분 기차까지 16분 남았습니다. “루예역 표 주세요!” “10시 31분 표 없는데요, 다음 기차는 오후 3시에요. 루예역에 저녁 7시 10분에 도착합니다.”


‘이런’입니다. 저녁 5시부터 6시 반까지 하는 오후 축제인데 7시 넘어 도착하면 의미 없습니다. 플랜B 바로 가동입니다. 기차 환승해서 가지 않고 바로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가오슝까지 고속철로 가서 거기서 루예역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는 방법입니다. 고속철과 일반 기차 매표소는 다릅니다. 우선 가오슝에서 루예역으로 가는 기차 시간 확인하니 점심 무렵인 12시 42분 출발입니다. 가오슝행 고속철이 그 시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오슝발 루예역 기차표 구매했습니다.


자 이제 서둘러 고속철 매표소로 향합니다. 10시 반에 출발하는 고속철은 있지만 좌석이 없습니다. 입석(자유석)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자리 하나 나지 않겠어 하는 심산으로 입석표로 일단 올라탔습니다.


대만 기차를 이용할 때 입석 경험이 많진 않습니다. 2호차로 들어가 좌석 주인이 올 때까지 앉아 있다, 오면 일어나는 메뚜기를 시연합니다. 2번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합니다. 역무원이 오네요. 입석표는 10~12호차만 이용할 수 있답니다. 몰랐네요.


10호차로 옮겨가니 같은 신세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지 2호차에 입석표 가진 사람이 너무 없길래 신기하다 했어요. 아이구 가오슝까지 서서갈 생각하니 다리도 안좋은데 무리다 싶네요. 하지만 중간인 타이중에 도착하니 상당수가 내립니다. 거기서부터 가오슝까진 편하게 앉아 갔습니다.


12시 5분에 가오슝 도착한 뒤 12시 42분 출발 일반 기차시간까지 30여분 남았습니다. 부리나케 도시락을 사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충전하며 흡입합니다. 시간이 어쩜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질까요. 물론 루예역까지 직행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건 어폐가 있네요. 하지만 제 특징입니다. 이미 결정난 거면 좋게 해석하자는.


루예역까지 가는 기차 종류는 자강(自強)호입니다. 대만도 여러 종류의 철도가 있는데 자강호는 우리로 치면 새마을호일 겁니다. 시설 꽤 괜찮습니다. 속도는 120km 정도 나오는 것 같아요.


KakaoTalk_20250726_222155916.jpg
KakaoTalk_20250726_222155916_04.jpg
KakaoTalk_20250726_222155916_02.jpg
KakaoTalk_20250726_222155916_03.jpg
타이베이에서 가오슝을 거쳐 루예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


3시 20분 도착이니 2시간 38분 걸리네요. 가오슝에서 루예역으로 가는 노선이 훌륭합니다. 바닷가를 따라 철로가 놓여 있습니다. 바다 풍광이 매력적이에요. 타이베이는 아침까지 비가 왔지만 타이동 지역은 햇살이 부서집니다. 마음이 다 풍성해집니다. 설레는 여행 기분 오랜만이네요.


루예역은 자그마한 역이네요. 2011년 열기구축제가 시작하기 이전엔 왠지 한적한 간이역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은 더 정감 있어요.


KakaoTalk_20250726_222658496.jpg
KakaoTalk_20250726_222658496_01.jpg
KakaoTalk_20250726_222658496_03.jpg
KakaoTalk_20250726_222658496_02.jpg
루예역 낮 풍경


내려오는 기차에서 확인하니 루예역에서 열기구축제장인 루예고원까지는 셔틀버스가 있습니다. 3시 36분에 출발한다고 나와 있어요. 탑승장에 도착하니 30분이고 37분에 셔틀버스가 옵니다. 우당탕탕 여행이지만 어느 여행보다도 시간이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드디어 루예고원 도착입니다. 말 그대로 사슴이 뛰어놀만한 들판이 고원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주변 멀리까지 전망이 좋습니다. 초원은 아니고 잔디밭이 잘 관리되어 있네요.


오후 행사 시작까지 1시간 남아 있습니다. 행사장 이곳저곳 기웃거려 봅니다. 실은 간단히 먹을거리가 있나 찾는 겁니다. 시간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통에 편의점을 들를 시간조차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가오슝역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산 아아만 텀블러에 담겨 있습니다. 고구마튀김 과자와 물 한 병을 사서 열기구가 놓이는 공간 반대편, 사람들이 매트를 깔고 열기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곳으로 향합니다.


시작시간까지 30여분 남아 있습니다. 1인용 매트를 깔고 누웠습니다. 아직 햇살이 강하네요. 선글라스를 끼고 우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햇볕을 가린 뒤 파란 하늘과 먼 산에 걸려 있는 구름 구경합니다. 구름이 바람결에 흩뿌려져 하늘하늘 거리는 게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시간이 왜 이리 좋을까요.


KakaoTalk_20250726_223013940_01.jpg
KakaoTalk_20250726_223013940_02.jpg
KakaoTalk_20250726_223013940_03.jpg
KakaoTalk_20250726_223013940.jpg
루예고원의 전경과 하늘 모습


5시쯤 되니 우산을 쓸 필요도 선글라스를 낄 필요도 없네요. 햇살이 구름에 적당히 가려져서요. 바람도 선선합니다. 요즘 대만 날씨 왜 이러는 걸까요. 야외에서도 선선하다니요.


행사 사회자가 드디어 자리합니다. 국제열기구축제이니만큼 각국에서 온 열기구 팀을 소개하면서 오후 행사 시작을 알립니다. 열기구들이 자리합니다. 더운 바람을 일으키는 불꽃들이 시험 삼아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옵니다. 애드벌룬도 바닥에 펼쳐놓습니다. 모두 14개의 대형 열기구와 3개의 꼬마 열기구가 이날 준비돼 있습니다.


열기구들이 하나둘 더운 공기를 가득안고 부풀어 올라 모양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날 참가한 브라질 열기구들은 우리가 아는 그 열기구 모양 그대로 달걀 모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먼저 떠올랐습니다. 다양한 모습의 열기구들이 뒤이어 모습을 갖추어 올라옵니다.


스포츠음료 FIN의 물방울 마스코트 모양 열기구가 맨 왼쪽에 자리했고요, 대만 기업 everrich 로고가 선명한 열기구가 옆에 있습니다. 타이둥과 타이완 관광청에서 올렸을법한 열기구도 있고 아기 드라큘라 모양의 열기구도 눈에 띕니다. 동물 모양의 에드벌룬도 있는데 무슨 에니메이션에 등장한 동물이겠지요.


제일 나중에 모양을 갖춘 열기구는 올해 열기구축제의 주인공 열기구일 듯싶습니다. 도라에몽 모양의 열기구에요. 도라에몽은 올해로 벌써 방영된 지 52년이나 된 일본 에니메이션이죠. 대만사람들은 도라에몽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일본 문화에 워낙 친숙한 나라인지라 그렇겠지요.


도라에몽이 펼쳐지면서 이제 모두 진용을 갖췄습니다. 이날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한 명이었구요. 멋있더군요. 볼만했습니다. 버킷리스트를 하나 지운 셈입니다. 어느 정도 보고 나서는 다시 편안히 매트에 누워 하늘 한번 보고 구름 한 번 보고 열기구 한번 보고 여유를 즐겼습니다.


KakaoTalk_20250726_223318054.jpg
메인 사진.jpg
KakaoTalk_20250726_223540032.jpg
KakaoTalk_20250726_223452779.jpg
열기구 모습


열기구를 보는 것도 좋지만 사실 이 시간이 이 느낌이 좋기에 여기 온 것일 터이지요. 좋은 걸 보면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찍은 사진들을 보냈습니다.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기분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6시가 넘어가자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마 단체로 온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일정이 있는지라 단체 사진을 찍고는 버스나 승합차 등으로 종종걸음 합니다.


혼자인 저야, 그리고 교통편도 이미 8시 12분 루예역에서 타이베이로 가는 기차를 예약해 놓았는지라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장소를 달리하면 다른 느낌일까 싶어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서 앉습니다.


6시 반이 지나가자 많이 어두워지네요. 사회자도 이제 마지막 행사를 앞두고 있다고 안내합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아파트 노래 장단에 맞춰 열기구들이 불꽃을 내뿜습니다. 일종의 클라이막스 서비스 연출인 셈입니다.


아파트 노래에 맞춘 열기구 불꽃쇼(?)


이날 행사가 끝났습니다. 열기구들은 이제 불꽃을 끕니다. 더운 공기가 사라지자 애드벌룬도 사그라들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승용차나 셔틀버스를 타고 나갈 준비들을 합니다만 전 기차역까지 걸어갈 심산입니다. 지도를 보니 4km도 되지 않고 고즈넉이 산길에, 지름길이기에 걷는 걸 좋아하는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나 다른 분들께는 이 선택을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금방 어두워질지 몰랐네요. 7시 넘어 가니 완전히 어두워진 산길에 혼자만 걸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외국인 혼자 무슨 감성을 느끼겠다고 이런 선택을 했나 싶네요. 걸음걸이가 빨라집니다. 지도상으로 40분 넘게 걸린다고 안내됐지만 30분 만에 주파한 듯싶습니다. 다행히 하여간 무사히 내려와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 앞에 있는 대만식 모듬튀김집에서 버섯과 오뎅, 두부, 콩깍지 튀김 한 봉지를 사고 우롱차 한잔 사서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저녁 8시 불빛에 비쳐진 루예역 모습이 느낌이 있네요. 사진으로 남깁니다.


KakaoTalk_20250726_224552506_01.jpg
KakaoTalk_20250726_224552506.jpg
루예역 밤 풍경


이렇게 해서 자강호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로 향하는 중입니다. 내려올 때는 고속철로 가오슝 노선을 이용했지만 올라갈 때는 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일반 기차 노선입니다. 곧 화렌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입니다.


사람이 많지 않은 밤기차. 오랜만입니다. 밤기차가 주는 그 특유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 맛을 좋아해 한때 밤기차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우당탕탕 닥공 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마음이 다 시원합니다. 중단 버튼 눌러 놓은 세탁기는 생각 안하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음 생애에도 엄마, 아빠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