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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세아 Feb 20. 2020

엄마는 사는 게 어땠어?

괜찮지만 괜찮지 않았던 질문


아이를 낳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였다.

일이 바빠 못 올 수도 있다 엄마는 사흘 나절 동안 남편과 교대하며 나를 간호하 중이었다.

수술부위아프다, 못 걷겠다, 폐에 물이 차서 눕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 엄마는 담담하게 말을 했다.


"딸 셋을 낳고 다시 들어선 애하나가 병원에서 또 딸이라고 는 거라. 너희 할아버지가 오죽 무서웠나.

떼라고 하셔 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생각도 안 하고 병원 가서 수술을 했지.

수술 다 하고 입원해 있는데, 배는 불에 타는 것 같이 아파도 세상 편하더라. 남이 해주는 밥 먹고, 가만히 누워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좋드라"


그렇게 몸이 아픈 와중에도, 누워서 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미소를 띤 채 이야기하는 엄마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목소리에는 눈물 냄새가 풍겼다.


엄마는 그랬다. 내가 다 자랐을 때도 큰 수술을 받고 입원해 무통 링거를 달고 있으면서도 아프다고 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는 단 한 번도 시집살이가 힘들었다고 한 적이 없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인생을 몰랐다.





엄마는 위로 오빠 둘, 아래로 동생 둘이 있는 집의 말하자면 장녀였다. 아픈 외할아버지일을 하시는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어린 시절부터 살림을 도맡아 했다.


열여섯이 되어,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데 글쎄 집에서는 돈을 안 준다는 거다.

엄마는 한창 부끄럼 많을 나이에 집에서 꽤나 떨어진 대도시의 한 야간고등학교에서, 낮에는 교무실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수업을 들으며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인돼서 이제 겨우 제대로 취직해서 돈을 벌려는 찰나, 외할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한다는 소식에 잠깐 다시 간호와 집안일을 시작했던 것이, 꼬박 삼 년이 걸렸다.

외할아버지는 극진한 간호에도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오랜 병원 생활로 가세는 기울고, 시기를 놓쳐 취직이 어렵자 큰오빠 손에 이끌려 선을 보게 되었는데, 엄마의 심성을 곱게 보신 동네 어른께서 멀지 않은 마을에 농사를 짓고 땅도 좀 있는 집안의 잘생긴 청년을 주선해 주었다. 꽃이 한창 날리던 계절에 큰오빠와 청년의 어머니가 말씀을 나누시던 자리가 마치자마자,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얼굴 한번 시내 밀다방에서 봤을 뿐인 그 청년이  함을 지고 온다고 했고, 세 번째 봤을 때가 결혼식장이었다.


손때가 탄 다이아반지와 경주 신혼여행을 시작으로

어안이 벙벙하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엄마의 큰오빠가 각했던 것처럼 평탄하지 않았다.

아니, 제사 많은 집의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애초에 그리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니었다.


아들 낳았다고 대놓고 면박주는 시어머니와, 찌개가 있어 국을 안 끓였다고 하니 수저를 들지도 않고 역정 내시며 상을 밀치고 나가시는 시아버지 덕에, 엄마는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출산하러 가는 길에 차를 태워주고 다시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가버리는 무심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마당 건너 사랑채에는 치매 걸린 증조할머니까지 계셨.

결혼할 무렵부터 곧 돌아가실 거라던 증조할머니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의 보살핌 덕분에 내가 어나고도 한참을 자라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십 년을 살아계셨고, 엄마는 자식 넷의 똥기저귀를 첫째부터 막내 것까지 9년을 빨면서 노인 한 사람분을 더 견뎌내야 했다.


둘째였던 내가 딸이라, 엄마가 눈칫밥을 먹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고작 2.75kg으로 태어났을 였다.

 무렵 옆집 사는 새댁인 동서, 작은어머니는 건강하고 튼튼한 아들을 낳았고 엄마는 순리대로 동서네에 어린 나를  맡기고 일까지 도맡아 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아플 때마다 모유를 못 먹어 그렇다고 안쓰럽게 바보지만, 내가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면서 밤새 우는 젖먹이를 달랠 때면 유난히 엄마가 생각났다.

얼마나 고된 육신으로 밭을 매고 살림을 하면서 갓 두 돌 된 언니와 갓난쟁이인 나를 데리고 잠들 수 없는 긴 밤을 보냈을까.


그리고 렇게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연이어 딸을 하나 더 낳았고, 그다음의 임신이 또다시 딸임을 알았을 ,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딸이면 수술하는 게 흔 시절이었어도 핏덩이 같은 아를 몇이나 낳아 제 손으로 길러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포기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결국 금쪽같은 내 새끼가 셋이나 있는 엄마는, 낳아놓은 아이들을 잘 키워내기 위해서 군말 없이 수술대에 올랐다.


그런 피폐함으로 입원한 병원에서 엄마의 기억은, 편히 먹었던 밥으로 남았다. 마치 그 전에는 제 손으로 차리지 않으면 한 끼도 못 먹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그랬을 우리 엄마.


결국, 장손의 대를 잇기 위해 딸 셋 밑으로 아들을 하나 더 은 엄마는, 아이 넷을 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치매 걸린 증조할머니를 모시며 투정도 없이 묵묵하게 살았다.

설이면 식혜를 담고, 가을이면 메주를 띄우고, 아이들이 뜯어온 쑥으로 쑥국을 끓이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밑반찬을 만들고, 남이 버리다시피 갖다 준 죽은 화분들을 하나하나 살리엄마 젊은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훌쩍 먹었다.

그래도 아직 철이 들지 못한 채, 마당 가득 싱그러운 화분을 돌보고 있는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의 인생은 어땠냐고 묻는 딸의 질문에 엄마는 이렇게 답한다.


"좋았지. 너그들이 있어서.

힘든 건 다 잊었다.

살다 보면 다 살만하다.

자식들 많이 낳아 놓으니까, 착하게 커가지고 다 효도하고, 좋더라.

니도 하나만 낳지 말고 더 낳아라."


엄마는 웃고 있지만,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서 참는다.

대답 대신 굳은살이 박히고 검어진 엄마의 손을 바라본다. 한때는 가늘고 고왔던 엄마의 손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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