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있고 나에겐 없어
intro
우린 정말 가지고 있는 재능이 달라
너는 잘하는데
난 부족하거나 못하는 게 뭐가 있을까?
설거지, 잘 웃기, 잠꼬대하기, 씻기, 돌아다니기...
아 이거!
너한테 있는데 나에게 없는 거!!
나는 건어물남이다. 감정 표현이 아주 바짝 마른 건조한 남편이다. 어떤 것을 보거나 먹거나 했을 때 100% 좋다는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정말 기쁘지도 않고 너무 슬프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성향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초등학생 때 어떤 국제행사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매스게임(집단체조)에 참여한 한 적이 있다. 초등학생들이 3개월 정도 저녁마다 모여서 밤 11시까지 군무를 연습했고 공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런데 탈의실에 돌아와서 복장을 갈아입을 때 주변 아이들이 하나 둘 씩 울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아이들과 지도해준 선생님들이 서로 껴안고 엉엉 울었다.
"왜 울지?" 나는 눈물이 전혀 나지 않았다.
"휴~ 다행히 잘 끝냈네." 그냥 후련하고 덤덤했다. 울음바다 속에서 멀뚱멀뚱 서 있으면서 나는 내 감정이 좀 메말랐단 걸 처음 느꼈다.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됐다.
친구들과 영화 '왕의 남자'와 '7번방의 선물'을 봤던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모두 클라이막스에 가서 눈물 콧물 다 빼고 있었는데 나만 덤덤했다.
직업으로 기자가 되고 나선 이런 감성 '드라이 에이징'이 더 심화됐다. 재난이나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놓지 않는 훈련을 했고, 그것을 표현할 때는 더 절제해서 썼다. 이런 '직업병'은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소한 일에도 단정적으로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그런데 나와 함께 사는 내 아내는 '감정 부자'다.
적당히 맛있는 음식도 "이거 진짜 너무너무 맛있다"고 쌍엄지를 올린다. 같이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조금만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옆에서 눈물이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콸콸 쏟아지고 있다.
아내를 만나고서 얼마 안 됐을 때 이 사람이 감정 표현에 역치값이 낮은 사람이란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내는 사소한 이야기에도 "아 웃겨"하면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하나도 안 웃긴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잘 웃는 건 좋은 거니까 좋은 점수를 줬다.
우리 부부의 자랑할 점이 있다면 하루에 "사랑해"란 말을 10번도 넘게 한다는 거다. 이것도 감정 부자인 아내의 영향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해", 눈 마주치면 "사랑해", 출근할 때도 "사랑해" 틈만 나면 말한다. 아내가 하니 나도 따라서 한다. 이렇게 사랑한단 말을 인사처럼 수시로 하는 부부가 또 있을까싶다.
이런 감정 부자와 살다보니 건어물남인 나도 감정 표현을 하는 게 점점 익숙해졌다. 요즘 헬스장에서 PT선생님이 내 고관절의 감각과 기능을 살려주고 있다면, 아내는 내 감정 표현의 기능을 살려주는 퍼스널 트레이너다.
요즘에는 침대에 누워서 자기 전에 '3초간 눈 마주치기'를 시킨다. 이거 해보시라. 생각보다 어렵다. 처음엔 어디를 쳐다봐야 될 지 몰라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것도 자주 하니 금세 익숙해진다.
여전히 힘든 것도 있다.
아내는 나한테 '나 얼마나 사랑해?'를 자주 물어본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엔 '하늘 만큼 땅 만큼'밖에 생각이 안 난다. 매번 똑같은 말을 하면 "그거 말고~!"란 말이 따라나온다. 내 감정 표현을 퍼스널 트레이닝 해주는 값으로 오늘밤은 참신한 사랑 표현 하나 준비해봐야겠다.
"여보,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