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아 차, 결혼하고 나서 알게됐다. 내 아내는 물티슈를 쓰고 뚜껑을 잘 닫지 않는다.
물티슈는 젖은 상태를 유지해야 쓸모 있는 것 아닌가. 마르는 걸 막아주는 뚜껑은 사용하고 반드시 닫으라고 있는 거다. 그럼 잘 닫아야지!
이게 내 뇌구조였다. 그렇다. 나는 따지기 좋아하고 지적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기자 남편이다.
그런 내 눈에 물티슈 뚜껑을 닫지 않는 행동은 사소하면서도 크게 다가왔다. 이 사람은 물건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가? 너무 덤벙거리는 건 아니겠지?
물티슈 뚜껑을 닫지 않아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것 나도 잘 안다. 물티슈가 좀 마르면 어떤가. 남이라면 물티슈를 열고 쓰든 두 장씩 쓰든 너그럽게 이해, 아니 신경도 안 쓸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와 함께 평생을 그려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사소한 차이도 대들보처럼 보였다.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하면서.
여기까지만 읽어도 피곤하신 독자님들께 송구하다. 이제 좀 덜 답답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얘기해보면 물티슈 뚜껑을 닫지 않는 아내와 그걸 못마땅해 했던 남편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결혼 선배들 앞에서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살아보니 인생은 내로남불이더라. 내가 못마땅하게 본 물티슈 뚜껑처럼 나도 옷을 벗어서 소파 위에 자주 올려뒀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걸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옷을 대신 걸어주면 됐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물티슈 뚜껑을 대신 닫았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알아서 옷을 잘 걸고, 물티슈 뚜껑도 잘 닫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두 개의 우주가 만나는 것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런데 두 우주가 만나면 엄청난 폭발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에너지를 잘 이용하면 두 사람이 쭉쭉 앞으로 더 잘 나갈 것이고, 아니면 파열음만 요란할 것이다.
아내와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경험도 매우 다르다. 나는 매사 일단 의심하고 본다. 직업이 기자인 걸 어쩌겠나. "그런 광고는 좀 믿지마" "귀가 그렇게 얇아서 어떡해" 이런 잔소리를 자꾸 한다.
아내는 느낌적으로 판단하기 좋아하는 디자이너다. 모든 디자이너가 그렇지 않겠지만 내 아내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이다.
나는 매사 심사숙고 하는 게, 사건의 이면까지 들여다 보고 판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굳게 믿어 왔는데. 옆에서 나와 다르게 사는 아내를 보니 그렇게 살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더라!
정말 당연한 진리인데, 세상에 사는 사람 수 만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인데 그걸 내 아내에게 적용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우리는 함께 살면서 대화를 참 많이 한다. 작은 소재만 가지고도 재잘재잘 잘 떠든다. 거기엔 두 사람의 관점이 뭉근히 녹아 있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서로 다른 샴푸가, 거실에는 액자와 스피커가, 작은 방에는 맥과 로봇청소기가 놓여있다. 서로 다른 관점의 두 사람이 만나 예쁜 집을 꾸민 것처럼 우리의 삶도 갈수록 예쁘게 크고 있다. 그렇게 두 개의 우주가 만나서 서로 관점을 녹여 나가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요즘 아내가 오일파스텔로 집안 곳곳을 그리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 소재를 그림으로도 표현해보자는 디자이너 아내의 아이디어다. 식탁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다.
앞으로 꾸준히 트집 잡는 (글도 쓰는) 남편과 그림 그리는 아내의 협동기를 연재할테니, 기대해주셔도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