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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Sep 20. 2022

영화로 영화 읽기

보이지 않는 것의 아이러니 - <버닝>과 <수리남>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영화를 묶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의 부제 보이지 않는 것의 아이러니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이창동 특별전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이창동 감독님은 항상 '아이러니'를 다루어 왔는데, <버닝>은 영화가 지닌 아이러니를 되묻는 영화였다. 여기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을 조금 인용해보겠다. "예술과 인식의 토대를 되묻는다는 점에서 근원적이다."


 이 말은 곧, 영화 이해의 실마리로써 <버닝>은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버닝>이 도대체 무엇을 묻고 있길래?라는 의문을 먼저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영화 <버닝>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먼저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음을 먼저 고백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다.)


 <버닝>은 미스테리와 스릴러의 형식을 갖춘 영화지만, 단순하게 장르영화로 분류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이 영화는 미스테리나 스릴러가 풀어내야 할 숙제를 절대 풀어내지 않는다. 예컨대 해미(전종서 분)는 죽은 것인가? 태워진 것인가? 그렇다면 범인은 벤(스티븐 연 분)인가? 혹은 그저 사라졌을 뿐인가? 이 모든 의문에 영화는 적확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의 의심을 증폭시켜 나갈 뿐이다.  


 <버닝>의 후반부에서 종수(유아인 분)는, 벤의 집에서 해미의 시계를 발견한다. 이상하게도 파주에서 함께 대마초를 피웠던 그날, '나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라고 고백한 벤의 취미가 너무도 '메타포'적이라서 종수는, 그리고 관객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 비닐하우스라는 것이 정말 비닐하우스였을까?  이어서 종수는 보일이(해미가 자취방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발견한다. 관객은 여기서 벤을 판단한다. '너가 그 쓸모 없다던 비닐하우스를 기어코 태워버렸구나'하며 말이다. 여기 물증까지 주어진 상태에서 관객은 벤을 범인으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영화는 정말 교묘하게도 그 정보가 틀릴 수 있음을 이전부터 시사했다. 해미의 시계는 사실 해미와 비슷한 일을 하는 댄서도 차고 있던 시계다. 이 말은 곧 그런 행사에서 으레 쓰는 값싼 시계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벤의 집에 있던 시계가 해미의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해미의 것이라 하더라도 값싼 시계에 불과한 것을 그저 벤에 집에 둔 채로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보일이는 어떤가? 분명 벤의 집에 있던 고양이는 보일이라는 소리에 반응한 것으로 보이지만, 해미가 키운다고 했던 고양이를 우리는 프레임 안에서 목격한 적이 없다. 종수가 먹이를 주러 가는 해미의 자취방에서 우리는 그것이 있을 것이라고 정황상 판단할 뿐이다. 더군다나 우리는(종수)는, 해미가 빠졌다는 그 우물이 현실이었는지 그녀의 메타포였는지도 파악하기 힘들다. 해미의 가족은 그녀가 '이야기를 곧 잘 지어내는 아이'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녀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해미를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목격했던 것일까?


 영화는 정말 교묘하게 프레임 안에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실'과 프레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을 섞어놓는다. 프레임 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 또한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없다는 것을 어버리는' 마임이 된다.


 그러나 본래 영화라는 것은, 프레임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이었다. 오슨 웰즈가 <시민 케인>에 딥포커스를 도입한 이래로, 우리는 프레임의 예술에 매료되었었다. 20세기의 영화는 그랬었다. 하지만 이 예술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은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가? 혹은 안에 존재하는가?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버닝>은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위에 인용한 이동진 평론가의 "예술과 인식의 토대를 되묻는다는 점에서 근원적이다."라는 한줄평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버닝>을 통해서, 그 미스테리의 퍼즐을 맞추어 가는 재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만이 전부인 것일까? 그것이 영화인가? 그것이 의미인가?를 생각하는 것 또한 재미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나만 이것이 재밌다면 곤란하다. 다들 재밌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수많은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바깥에 존재하는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그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와 마주하곤 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모든 것을 담지 못한다. 난 이것에 주목하고 싶다. 명백하게 현실을 담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조차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는 '선택'의 문제고, 그 선택을 하는 것은 감독이겠지만, 그 선택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프레임 안팎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 구태여 <수리남>을 묶어내려 했던 이유를 밝혀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수리남의 <수리남>에 대한 항의에 대한 변호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약 국가로서의 '오명'을 쓴 수리남은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제목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대한민국을 제외한 국가에선 "Narcos-Saint"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고 있다. (역시나 일본은 독자적인 제목인 ナルコの神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고 있다.)


  <수리남>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수리남이라는 국가가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인구'(하정우 분)가 왜 수리남에 가야만 했냐를 먼저 따져야만 한다. 그의 전사를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면서 그가 살아 온 삶의 고난과 역경은, 한국 현대사 속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고, 그것은 사실 "국제시장"의 황정민과도 거의 유사한(물론 <수리남>은 그것보단 뒷세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인구는 사실상 한국의 공권력, 한국 정부에 의해 쫓겨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시장>이 취하는 그 보수적 노선과 다른 이유인 것이다. 강인구는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사장이었고, 어느날 그 가게에 찾아 온 것은 부패 경찰이었다. 뇌물을 요구하고 협박을 종용하던 부패 경찰. (이것은 재미있게도 전요환의 전사와 부분적으로 겹친다.) 강인구는 수리남으로 떠나지 않겠냐는 친구 박응수(현봉식 분)의 제안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이기도 하지만, 부패경찰을 구타한 덕분에 수리남으로 내쫓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사업 수완과 영어 능력 덕분에 수리남의 군인까지 회유하게 된 강인구는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살아야만 했던 자신의 삶을 벗어날 기회를 찾는다. 그가 가난하게된 연유는 그 '굴레'였다. 사회적으로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상황, 아무리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해도 부유해질 수 없고 집한 채 가질 수 없는 굴레. 이 굴레에 빠지게 된 이유는 과연 개인의 잘못에 있는가?


 재미있게도 <수리남>은 그런 부분을 거의 고의적으로 비추지 않는다. 강인구의 끝없는 낙천성, 의지에서 개인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비춰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고군분투는 사실상 꼭두각시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기회의 땅 수리남에서 얻은 것은 마약 밀매라는 혐의와 절친한 친구 박응수의 죽음이었다. 사업자금 5억을 모조리 날리고, 그는 이역만리 땅에서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를 겪게 된다.

 

 극의 진행 중에 밝혀진 사실은, 마약은 전요환이 넣은 것이 맞지만, 그것을 고의적으로 노출시켜서 강인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사업까지 망하게 만든 것은 국정원 때문이었다. 강인구는 여기서 또한번, 국가로부터 버려진 개인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강인구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국정원 요원을 뛰어넘는 기지를 발휘하고 전요환을 검거하는 작전을 주도적으로 성공시키는 공신이 된다. 개인적으로, 무간도와 디파티드에서 나타난 언더커버 요원의 그 불안함들을 인상 깊게 봤던 나로서는 조금 비현실적이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인구가 마지막에 전요환이 진짜라고 한 박찬호 사인볼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떤 쓸쓸함이 담겨있다.


 그는 모든 작전을 성공시키지만, 애초에 국정원으로부터 약속한 현금 5억을 받지 못한다. 대신 국정원으로부터 단란주점을 몇 개 인수하라는 제안을 받긴 하지만 그것은 다시 국정원의 감시를 받는 셈이기에, 더러운 꼴을 많이 본 강인구로서는 거절한다. 마치 우정같이 보였던 그 제안에도, 무언가 씁쓸함이 담겨 있는것은 바로 프레임 속에서 보이지 않던 강인구가 내던져진 세계가 너무도 비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성실하게 살고자 했을 뿐이고,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의 삶을 위해 살아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총을 들고 사람을 쏘아야만 했고 군대와도 맞서야 했다.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내던져진 채 고군분투한 수리남의서의 삶은, 정말 고의적이다시피 내던져진 삶에 가깝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로부터, 국정원으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한 강인구는, 거짓 믿음을 선도하는 전요환에게 오히려 진짜를 건네 받는 믿음을 받았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윤종빈 감독은 정말이지 고의적으로, 이런 사회비판의 메세지를 감추되 슬쩍 흘리듯이 배치해 두었다. 사실상 수리남은 우연히 실존하는 배경이었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강인구가 내던져진 상황 이면의 작용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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