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차, 산티아고 - 네그레이라 20.6km
[무시아 - 피스테라 길 2편]
9월 2일
아침 8시에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으로 나갔다.
한산한 광장에서의 독사진을 원하면 적어도 9시 이전엔 와야 한다. 그 이후엔 사람이 점차 많아진다. 어젠 흐려서 사진을 몇 장 찍지 않았었다. 카메라에 성당 사진을 몇 장 더 담으며 페데리카를 기다렸다.
그녀는 늦잠을 잤다며 9시 30분쯤에 나올 거라 DM을 보내왔다. 이윽고 30분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함흥차사다. 빨리 안 오면 그냥 간다고 하자 거의 다 왔다며 다급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광장 반대쪽 입구 저 멀리서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여기서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은 페데리카가 되었다.
페데는 우리가 로그로뇨 가는 길에서 처음 만났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수비리에서 처음 본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술 파티가 벌어지던 문제의 광장 텐트에서, 한 손엔 술잔을 들고 입엔 담배를 문 채,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연신 손짓을 하여 술자리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술 담배 좋아하는 저 날라리를 멀리해야겠다고 그때 광장을 지나가며 생각했었다.
수비리의 근엄한 순례자였던 나는 지금 스페인의 피에스타를 누구보다 열심히 즐기고 있으며, 멀리하려던 그녀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이때까진 몰랐는데,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우리는 론세스바예스의 순례자 저녁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ㄷㄷ
페데리카는 이번 순례길에서 얻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매일 같은 옷을 입어도, 흙먼지와 땀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항상 좋은 옷과 좋은 음식, 좋은 호텔을 찾아다니던 밀라노 출신의 아가씨는 까미노가 좀 더 내면을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살며시 고백했다.
그녀는 공립 알베르게를 철저히 피해 다녔고, 어제 무시아 - 피스테라 투어를 다녀오자마자 네일과 페디큐어, 그리고 스킨케어까지 받으러 간 건 알고 있다. 화려한 도시의 삶이 때로 공허하게 느껴질 때, 그녀는 여길 다시 찾아올 것만 같다.
새 옷을 살 겸, 조나와 데카트론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냥 입던 옷으로 버티며 오늘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광장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고, 하루 더 머무른다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할 일이 있는데 놀면 뭔가 불편한 바로 그 느낌이다.
조나에게 미안하다고 DM을 보내고 성당 광장을 떠나 도시를 벗어났다.
드디어 친숙한 화살표가 다시 보이고, 시계를 확인하니 열시다. 출발시간이 늦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네그레이라로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숲 속 오솔길이 펼쳐졌다. 오늘 구간 후반엔 꽤 급한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은 즐겁고 유쾌한 산책이다.
조금 더 걷다 아스토르가에서 처음 봤던 전직 신부 프랭크를 만났다. 어제 미사에서 멀리서 보아 긴가민가 했던 사제가 프랭크가 맞았던 것이다.
역시 아스토르가 때와 마찬가지로 수다 공세가 들어왔다. 그때도 와인과 맥주를 꽤 자시더니 무신자인 나에게 쉴 새 없이 축복을 내려주었었다. 사람은 좋은데, 자꾸 한소리 또 하고, 한 질문 또 하는 녹음기 같은 분이다. 내 대답도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자동 응답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프랭크는 네덜란드부터 세 달을 걸어와 이제 피스테라를 목전에 두고 있다. 곧 다시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생각에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물론 이 이야기도 아스토르가에서 다 들었었다.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카페를 만나, 커피를 마시자고 권했다. 먼저 마시고 살짝 빨리 떠날 요량이었다. 카페에는 아까 아침 산티아고 광장에서 얼핏 스쳐 지나간 여성분이 커피와 또르띠야를 즐기고 있었는데 프랭크가 갑자기 합석을 시도했다. 이번엔 저분에게 축복을 내리고 싶은 모양이다.
올가는 독일에서 태어난 러시아계이며 런던에서 16년간을 살았다. 너무 배가 고파 또르띠야를 두 개째 먹고 있었다 한다. 어제 미사에서 프랭크에게 영성체를 받았다며 이게 웬 우연이냐며 놀라워했다.
얼른 커피를 마신 후 프랭크 것까지 계산하고 나서 슬쩍 떠날 타이밍을 재었다. 올가에게 프랭크를 맡기고 떠나면 되겠다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올가가 화제를 돌려 나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떠날 타이밍을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한참을 동행하게 되었다.
마침내 둘의 대화가 길어지고 막 거리를 벌리려는 찰나 이번엔 갑자기 러시아 출신의 알렉스가 프랭크의 포섭에 걸려들었다.
17일 만에 생장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알렉스는 영어를 잘 못해 러시아어로만 대화를 하였다. 올가는 러시아어를 하므로 자연히 둘이 러시아어 대화가 이어지고, 올가는 오랜만에 러시아어를 쓰게 되었다며 좋아한다. 그리하여 또다시 프랭크와 내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알렉스는 걸음이 무척 빨랐는데, 올가도 거기에 맞춰 전혀 지지 않고 따라갔다. 그녀도 27일 만에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주파했다는 무시무시한 체력의 소유자다.
이제 네그레이라까지 얼마 안 남았으므로 후딱 달려 올가와 알렉스를 다시 따라잡고 내친김에 타운 입구까지 뛰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가는 18.6만 인스타, 10.3만 틱톡 구독자를 보유한 여행 사진가 인플루언서이다.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들에겐 개인 인스타를 교환해서 몰랐다. 인스타는 @liolaliola
왜 자꾸 뛰느냐고 여쭤보는 분들이 많은데, 러닝 하이가 찾아오면 고통이 사라지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걷다가도 곧잘 뛰어가는 편입니다.
네그레이라에도 뭔가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세 차림을 한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쯤 되면 스페인에선 피에스타를 안 하는 마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관광객이 꽤 있는 마을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일렀기에 피에스타는 미뤄두고 알베르게를 먼저 찾아 들어왔다.
네그레이라 알베르게는 19자리밖에 없고 대부분 일층 침대다. 그래도 부실하나마 주방엔 식기가 있어 뭔가 끓여 먹을 수 있어 보였다.
역시 와이파이 안내가 붙어 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다가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나라를 여행했는지 이야기가 나와, 마테오에게 종이 접시 뒤에 세계지도를 그려보라 했다. 만화가인 마테오는 나라들 위치를 술술 곧잘 그린다. 지리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보다. A+라고 접시에 적어주었다.
짐을 풀면서 프리미티보길에서부터 왔다는 루카스, 슈테판, 니뇨와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지나온 마을과, 앞으로 여정에 대한 계획이다. 마을 이름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 마을 이름을 까먹는다. 심지어 오늘 묵는 마을 이름이 네이그레아 인지 네그레이아 인지, 내일 갈 곳이 올베로이라 인지 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하니, 다들 똑같은 모양이다.
워낙 많은 마을을 지나오기도 했거니와, 크지 않은 스페인 마을들 이름이 쉬이 입에 붙지 않는다. “어제 묵었던 마을 이름이 산티아고였던가?” 하고 농담을 쳤더니 다들 배꼽이 빠져라 웃는다.
시장을 보러 잠시 나갔다 왔다. 피에스타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취사 가능한 주방이 있다면 파스타가 가장 만만한 저녁이다. 슈퍼에서 사 온 병 소스에 파스타만 익혀 섞어도 맛난 한 끼가 완성이다. 별것 넣지 않아도 친구들끼리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다. 싸구려 팩 와인이 한 잔씩 돌아가니 오늘도 금주는 틀렸다. 이탈리아 조상들은 파스타가 까미노에서 이렇게 사랑받는 음식이 될 줄 알았을까?
해가 저물어가고 마을에선 음악소리가 들려오는데 흥이 나지 않아 다시 나가지 않았다. 다녀온 사람들 이야기로는 중세 차림으로 행렬도 하고 꽤나 볼만했다고 한다.
자정이 가까워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자다 말고 모두 일어나 창가로 모여들었다. 2층인 데다, 알베르게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해서 더 잘 보였다.
10:00 ~ 14:20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네그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