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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Jan 21. 2022

10월을 위한 영화 31편 04

12일-15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은 깊은 상처로 남아있고, 어떤 것은 단단히 굳어져 돌덩이처럼 박혀있기도 한다. 어떤 고통은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고통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자아가 강한 녀석이다. 고통을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간의 재주로는 그럴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잔인하고 힘들더라도 그 고통에 순응하며 그것을 다스리든지, 아니면 그것에 끌려다니든지. 어느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흔적 속에 살아가는 네 명의 이야기를 모아보았다. 고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지만, 살다 보면 그 고통을 마주할 용기와 힘이 생길 때가 온다. 그러니 고통 자체에 너무 집중하지는 말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2016


감독 케네스 로너건 Kenneth Lonergan

각본 케네스 로너건 Kenneth Lonergan

출연 케이시 애플렉 Casey Affleck, 미셸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 루카스 헤지스 Lucas Hedges, 카일 챈들러 Kyle Chandler

퀸시에서 단칸방에 살며 건물 잡역부로 일하고 있는 리는 급하게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로 향한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형이 한 시간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리의 형인 조는 평소 심장병을 앓아왔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망 소식은 리를 굳어버리게 만든다. 장례식 등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한 가운데, 형의 친구였던 조지가 도와주겠다고 나서고, 리는 조카인 패트릭을 데리러 간다. 아이스하키 연습을 하고 있던 패트릭은 삼촌 조에게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을 준비하던 중, 리는 겨울이라 땅이 굳어 시신 매장을 봄에나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동안 리는 패트릭의 집에 함께 머무르기로 하고, 그와 함께 유언장을 확인하러 변호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형이 자신을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했다는 것을 알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져든다.


리는 고통을 안고 살고 있다. 잠깐의 실수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다. 너무 끔찍해서 차마 다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리는, 죽지 못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치이고, 그 고통 속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말이다. 제대로 된 부모가 되지 못했던 그는, 형의 사망 소식과 함께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을 떠맡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성장해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섣부른 위로와 화해와 행복한 결말로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게 리가 숨 쉴 수 있는 창을 조금 열어놓을 뿐이다. 주로 무조건적인 희망과 사랑이 꽃처럼 피어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때론 이런 영화들이 더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아끼게 되는 그런 마음이랄까.


싱글 맨 A single man, 2009


감독 톰 포드 Tom Ford

각본 톰 포드 Tom Ford, 데이비드 시어스 David Scearce

출연 콜린 퍼스 Colin Firth, 매튜 굿 Matthew Goode, 줄리앤 무어 Julianne Moore, 니콜라스 홀트 Nicholas Hoult

조지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고통 속에서 잠을 깬다. 지난 8개월 동안 깨어난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일 뿐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가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다. 8개월이 지났는데도 연인 짐의 흔적은 여전히 집안 곳곳에 남아 있다. 그와 16년을 함께한 연인 짐은, 덴버에 있는 집에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하고 말았다. 짐의 가족들이 원하지 않아, 그는 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조지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다를 것 같다. 그는 대학 강의 교재인 올더스 헉슬리의 책 'After many a summer'와 함께, 서랍에서 꺼낸 총 한 자루를 가방에 챙겨 넣는다. 학교에 도착한 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가고, 한 학생이 자신의 집주소를 물어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업에 들어간 그는 책과 관련된 질문들을 하다,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를 채우고, 강의 후 자신을 따라온 학생 포터와 잠깐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술을 사러 갔다가 한 스페인 청년을 만나고, 오랜 친구인 샬롯의 집을 방문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다가 술이 없음을 알고 술을 사러 바에 가고, 그곳에서 낮에 만났던 학생 포터를 다시 만난다.


영화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1962년, 동성 연인을 잃은 한 남자가 매일 아침 고통 속에서 깨어나는 삶을 청산하고자 결심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마약을 해봤냐는 학생을 만나고, 건장한 육체로 살아 움직이는 젊은이들을 보고, 멀리 마드리드에서 온 잘생긴 청년을 만나고, 오랜 친구를 만나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그렇게 그의 하루는 살아있는 것들로 가득 찬다. 매일 고통 가운데 깨어나 다시 또 하루를 반복하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세상은 활기 가운데 놓인다. 그리고 그의 삶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길로 접어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세 커플이 계속 아른거렸다. 영화 속의 짐과 조지, 원작을 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그의 실제 연인 돈 바카디, 그리고 영화를 감독한 톰 포드와 그의 실제 연인 리처드 버클리. 모두 나이차가 많은 커플들인데, 자신의 연인보다 30살이나 많았던 이셔우드는 왜 어린 연인이 먼저 죽고, 그 죽음으로 고통받는 남겨진 이에 대한 글을 썼을까 궁금해졌다. 연출을 맡았던 톰 포드는 후두암으로 고생한 리처드 버클리와 고통의 시간을 함께했기에 어쩌면 조지의 마음을 더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디 아워스 The Hours, 2002


감독 스티븐 달드리 Stephen Daldry

각본 데이비드 헤어 David Hare

출연 메릴 스트립 Meryl Streep, 줄리앤 무어 Julianne Moore, 니콜 키드먼 Nicole Kidman, 스티븐 딜런 Stephen Dillane, 에드 해리스 Ed Harris, 미란다 리처드슨 Miranda Richardson, 토니 콜레트 Toni Collette, 앨리슨 재니 Allison Janney, 클레어 데인즈 Claire Danes, 제프 대니얼스 Jeff Daniels, 아일린 앳킨스 Eileen Atkins, 존 C. 라일리 John C. Reilly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행복한 얼굴로 침실에 누워 자고 있는 아내 로라 브라운을 확인한다. 1923년 영국 리치먼드, 한 남자가 'Hogarth House'라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금 검진을 마치고 내려온 의사를 만난다. 의사는 그의 아내에게 안정이 필요하다며 거처를 옮기지 말라고 한다. 2층 침실에는 그의 아내 버지니아 울프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누워있다. 2001년 미국 뉴욕, 한 여자가 이른 아침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조용히 옷을 벗고 연인 클라리사 본이 자고 있는 침대에 조용히 들어가 눕는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소설을 읽는 로라 브라운,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클라리사 본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매개로, 세 시대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의 하루를 따라간다. 불안정과 정신병으로 두 번의 자살 시도까지 했던 버지니아는 그녀의 안정을 위해 남편 레너드를 따라 조용한 리치먼드로 이사와 살고 있다. 그러나 하녀들의 감시와 의사의 권유에 따른 삶이 그녀를 갑갑하게만 만든다. 겉보기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라는 매우 불행하다. 한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녀의 아들 리처드는 왠지 그녀가 느끼는 불행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듯하다. 샐리와 10년째 함께 살고 있는 클라리사는 옛 연인이자 친구인 리처드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파티는 결국 열리지 못한다. 세 사람은 각자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 괴로움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들은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애쓰는 세 사람보다 리처드에게 더 마음이 갔다. 과연 누군가의 괴로움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이기만 한 것일까? 그 괴로움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또 다른 괴로움이 될까, 아니면 그 괴로움을 이겨낼 힘이 될까?


버닝 맨 Burning man, 2011


감독 조나단 테플리츠키 Jonathan Teplitzky

각본 조나단 테플리츠키 Jonathan Teplitzky

출연 매튜 굿 Matthew Goode, 보야나 노바코빅 Bojana Novakovic, 에시 데이비스 Essie Davis, 레이첼 그리피스 Rachel Griffiths, 잭 힌리 Jack Heanly

한 남자가 긴 곱슬머리 가발을 쓴 여자를 앞에 두고 자위를 하고 있다. 32세의 백인 남성이 피투성이로 병원에 실려온다. 남자는 레스토랑 주방에서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고, 한 여자가 들어와 그에게 욕을 퍼붓는다. 분주하고 거칠게 차를 운전하던 남자는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는 좌회전을 하다 사고가 나고, 차 안에 가득하던 식재료는 도로 곳곳에 흩어져 버린다. 남자는 식재료를 사며 통화 중이다. 누군가 그를 재촉하는 모양새다. 남자는 병원 창가에서 통화를 하다가, 들어가도 좋다는 간호사의 말에 돌아선다. 남자는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집을 보러 온 사람을 만나러 간다. 남자는 8살 아들과 함께 모텔방에 머물고 있다. 그는 톰 키튼이다.


영화는 마치 패치워크처럼 톰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와 관계없이 이리저리 붙여놓은 모양새이다. 첨엔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리 화가 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한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캐런은 누구인지, 대체 지금 저 장면이 이전 장면보다 앞선 상황인지 뒤선 상황인지 물음표를 한가득 안고 보게 된다. 그러다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그 괴로움을 같이 느끼게 된다. 괴로움과 슬픔으로 뒤죽박죽이 된 세계 속에서 길을 잃은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제 방향을 찾는다. 그저 맞는 방향을 찾아 한 발짝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가 가진 고통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는 그것과 함께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조금씩 새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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