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 나온다.
가드닝 분야의 빛나는 명저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카렐 차페크는 채소를 가꾸는 텃밭러를 위해 억지로 한 챕터를 할애했다. '먹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만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작가의 사색적인, 어쩌면 현학적인, 내용에 짜증 내(리라 예상돼)는 채소밭 텃밭러를 향한 변명의 장(場)을 마련해 두었다. 제목도 마지못해 붙인 티가 역력한 <채소밭 정원가들>이다. 채소밭을 가꾸는 정원가들이 "무식하고 허영만 가득 찬 사람이 무슨 정원가야? 정원이 가꾸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채소)들은 몽땅 빼먹어놓고 선!" 하고 작가에게 성난 호미를 들이댈 것에 대비해 보험을 들어 둔 셈이다. 목차 순서도 6월 다음, 정확히 중간이다. 완벽한 기계적 중립!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정원에 채소를 가꾸는 사람은 정원가가 아니란 말인가? 가드닝 분야의 명저라더니 채소밭 텃밭러를 무시해도 되는 건가? 열등감이라거나 자격지심은 아니었다. 텃밭러를 정원가라고 불러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사람 입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채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자 묘하게 울컥했다. 크로커스나 스노우드롭, 캄파눌라, 그리고 페트로칼리스 파이레나이카에 대한 질투심 같은 건 결코 아니었다. 흠흠.... 집에서는 구박덩어리 자식이라도 남들한테 얕잡아 보이는 건 싫은 법이지 않던가! 게다가 스콧 & 헬렌 니어링 부부는 식탁에 오르는 채소들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가.
채소밭 정원가들의 즐거움을 깰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채소를 재배하면 자신이 기른 것들을 입안에
마구 욱여넣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이자 '로봇' 단어의 창시자는 '나눔'도 모른단 말인가? 한때 채소를 재배한 적이 있다고 카렐 차페크도 솔직히 고백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혼자서 무 120개씩을 먹어치우고, 한 주 내내 상추로 삼시 세끼를 해결했다고 부풀려 말했다. 이웃도 가족도 그의 채소를 '거부'했기에 그 많은 채소가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나 뭐래나. 이는 그가 자신의 정원에 더 이상 채소를 심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과장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설령 나눌 이웃이 없더라도, 가족 모두가 채소를 먹지 않더라도 진정한 정원가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루에 무 200개면 어떻고, 한 달 내내 상추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면 또 어떤가! 그것이 진정한 조화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카렐 차페크는 채소밭 정원가의 길을 끝내 포기했다. 채소밭 정원가에게, 텃밭러에게 등을 돌렸다(물론 등 돌린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채소밭 정원가도 그를 등졌다. 텃밭러가 잃을 건 가드닝 분야의 빛나는 명저요, 얻을 것은 온갖 맛 좋고 싱싱한 채소들 일지니.
여기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채소밭 정원가, 아니 텃밭러가 있다. 삼시 세끼를 상추를 비롯한 쌈채소로 해결한다. 물론 먹다 남은 치킨, 곡물 식빵, 방울토마토, 삶은 달걀, 슬라이스 치즈의 도움을 받는다. 유기농(한살림) '간장 샐러드 소스'가 없다면 해내지 못했으리라. 밥으로 먹고, 안주로 먹고, 간식으로 먹고, 심심할 때도 먹었다. 아이들 간식으로 주었다가 입도 대지 않아 버리기 아까워 또 먹었다. 쌈채소 나눔처인 아래층이 이사를 간지 한 달이 지나 더는 나눌 수 없어 먹고 또 먹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상추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코끼리가 되어 있었다. 매일 1톤씩 채소를 먹어 치우는. 꿈에서도 행복했다. 그런데 꿈속에서 코끼리가 울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던가! 꿈에서 깼다. 나도 울고 있었다. 내가 코끼리 꿈을 꾸었던가, 코끼리가 내 꿈을 꾸었던가? 그 순간만큼은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영화배우 설경구가 박하사탕에서 불렀던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왠지 카렐 차페크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래도 채소밭 텃밭러의 길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채소 가격이 고공 행진해서도,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인생을 배워서도 아니다. 이제 정말 채소를 가꾸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자연에 다가선 사람만이 자연이 내어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다. 신의 가호일지 유전자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푸성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살면서 한 번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는 일이라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