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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Oct 31. 2022

나는 선택했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


2020년 6월 코로나가 한창이었을 때 본가에 가 있었. 그때 부모님과 나, 8살 딸이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다가 엄마의 맹장 수술 얘기가 나왔다.

내가 결혼하던 해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엄마는 몇 년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그렇게 부지런하던 분이 집안일도 다 손을 놓았다. 손녀가 태어나고 활기를 찾으시는 것 같더니 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밥 먹을 때와 약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주무셨다. 손녀를 보고도 자주 웃지도 않으셨다. 엄마에게서는 삶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의 어떤 말이나 노력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를 제대로 못해 계속 살이 빠졌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맹장 수술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밤에 주무시다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셨고 바로 수술을 하셨다고 한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생각보다 엄마의 표정이 밝았다. 아픈 와중에도 너무나 살고 싶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극한의 복통이 엄마의 삶에 대한 의지를 되살려주었다. 빠졌던 살도, 머리카락도 다시 돌아왔다. 생기도, 웃음도 되찾으셨다. 타이밍 딱 맞춰 아파준 엄마의 맹장이 얼마나 고마는지 모른다.

그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때 내가 맹장 수술했던 얘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나는 고2 때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맹장수술을 했다. 수술 전날 나는 배가 아파 오빠와 함께 병원에 갔다. 진료하던 의사가 너는 나가 있고 보호자 들어오라고 했다. 오빠가 진료실로 들어가고 혼자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혹시 무슨 큰 병에 걸린 건가 싶어 무섭고 두려웠다.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가 갑자기 정색하면서 "무섭긴 뭐가 무서워. 엄마가 같이 있었는데!!" 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 엄마, 병원에는 오빠랑 나랑 둘만 있었고 그때는 의사가 나더러 나가 있으라고 해서 나 혼자 밖에 있어서 그랬다니까." 하자마자

"엄마가 아픈 너를 혼자 둔 적이 없어!! 무섭긴 뭐가 무서워!!!"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그날 의사는 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부모님도 병원에 오셨고 의사의 말을 들은 엄마는 나에게 많이 아픈 게 아니라면 다음 주가 방학이니 그때 수술을 하라고 했다. (당시 나는 급성 맹장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딸이 아프다는데 그 와중에도 학교 출결을 신경 쓰는 엄마가 야속하고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가 지금 수술해도 된다고 해서 엄마 보란 듯이 그럼 지금 수술하겠다고 했다. 이게 '그날'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그때 '방학이 코 앞인데 하필 지금 수술이라니...'라는 듯한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보다는 주변 상황이나 다른 사람, 도덕적 기준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엄마에게는 그게 당연하고 옳은 일이었기에 나에 대한 미안함은 없었다. 서운함을 얘기한들 공감이나 사과는커녕 다툼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한 번도 엄마에게 서운함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한껏 쌓아 올렸던 둑이 터져버렸다. 나는 8살 딸이 보는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무서웠다는데!!! 왜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그렇다는데!!!!!!"라고 소리치면서.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내가 아플 때 안 챙긴 적이 없는데, 자기를 원망하고 있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고 결국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셨다.  

그때 나를 혼자 뒀다고 엄마를 원망한 적이 없다. 그냥 그 순간의 내 감정을 얘기한 것뿐이었다. 내 감정을 무시한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한참을 울고 나니 그제야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울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이를 얼른 안았다.


그때 아빠가 한숨을 쉬말씀하셨다.

"엄마가 아파서 그래. 자기한테 잘못했다고 하는 거 같으면 엄청 싫어하고 화를 내.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라."

맥이 탁 풀렸다. 요즘 엄마가 건강해 보여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 엄마의 병에 대한 나의 무지와 안일함을 반성했다. 리고 생각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내가 지금 할 수 있고, 해서 도움이 되는 일은 뭐지?'


이참에 그동안 쌓인 걸 다 터트려버리고 싶은 마음과 엄마와 오래오래 좋은 관계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떠올랐다. 쌓인 걸 다 터트린들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고 엄마와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엄마와 좋은 관계로 계속 지내는 게 내가 가장 원하는 거였다. 그러려면 엄마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게 지금 내가 할 일이었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이에게 사과하는 것. 긴장감 팽팽한 그 순간, 그 한가운데에 아이를 내버려 둔 것에 대해.

"많이 놀랐지. 미안해. 엄마가 할머니가 아프신 걸 깜빡 잊었어. 할머니랑 화해하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줄래?" 

아이가 안정을 찾는 걸 보고 엄마에게 갔다.


그날 엄마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과거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다. 조금 전에 소리 지른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리고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얘기들을 하셨다. 그냥 묵묵히 들다. 엄마의 기억과 내 기억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납득이 되진 않았지만 과연 엄마의 기억만 왜곡됐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십 년이 지난 일이고 내 기억 역시 왜곡됐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엄마의 사과, 나의 억울함 토로는 이 한 번이면 됐다.

더 이상 과거로 회귀하지 말고 현재에 살자고 다짐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후회하고 상처를 들추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나 자신을 더 파괴하는 일인지 깨달았다. 어린 나는 힘이 없어 상처받기 쉬웠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어른인 지금은 내가 선택해야 하고 선택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상처받도록 두지 않는 건 이제부터는 나의 몫이다.


이제는 아이에게 과거의 나와 같은 상처를 대물림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안심도 됐다.

아이가 어릴 때 나는 원인 모를 두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몇십 년째 엄마 진료하는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는데 그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엄마와 딸은 연결되어 있어서 엄마에게서 딸에게, 그리고 그 딸에게 대물림이 된다고. 그러니 우리 딸이 나처럼 아프지 않게 하려면 내가 잘해서 그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고.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족쇄가 되었는가. 이제는  족쇄를 풀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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