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들어오기까지 남은 기간은 15일. 집에 있는 식재료로 남은 반(1/2) 달을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계란 9알, 너구리 라면 6개, 스파게티 2인분... 아슬아슬하게 끼니를 맞출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자 그제야 안도했다. 물론 간장계란밥을 요리할 때 달걀을 하나만 써야 하겠지만.
돈을 다 썼다. 통장 잔액보다 카드 사용액이 더 많으니 있지도 않은 돈까지 털어 쓴 셈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국에서는 이렇게 대책 없이 살진 않았다. 1년에 얼마를 모으겠다는 저축 계획이 뚜렷했고, 일정 비율 돈을 떼 펀드와 ETF를 섞어 가며 투자했다. 지하철 교통비도 아까워서 다섯 정거장까지는 걸어 다니던 내가 왜 호찌민에 와서는 흥청망청이가 되어 버렸을까.
직접적인 원인은 계좌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번 돈을 한국의 은행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적금도 주식도 하지 못한 채 통장에 돈이 쌓이다 보니 게임 머니처럼 느껴져 버렸다. 첫 독립이자 외국살이가 주는 설렘 역시도 한몫했다. 그렇게 신나게 돈을 썼다. 관리비 낼 돈이 없어 허덕이는 결말이 올 줄도 모르고.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의 호찌민 라이프를 ‘인생’이라 여기지 않은 죄가 크다. 한국에서의 삶은 일시정지 되었고 베트남에서 잠시 보너스 스테이지를 누린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뭐든지 쉬웠다. 오늘 밤의 즐거움에만 집중하고 수중에 돈을 집히는 대로 뿌려댔다.
삶을 멋대로 번외편 취급한 대가는 서서히 돌아왔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한국에서 맺었던 관계들이 스러져 갔다. 거기서 잘 지내냐는 류의 의례적인 질문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불은 꺼지고야 말았다. 나는 지인들에게 ‘베트남 간 걔’가 되어 추억 너머로 사라졌다.
몸뚱이 역시 착실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나는 팔팔한 20대였다. 지하철 환승구역에서 빠르게 이동하고 버스에서 선 채로 몇십 분을 갈 수 있는 몸이었다. 세월이 지나 성수역 외선순환선 환승구역을 다시 맞이했을 때, 421번 버스에서 고등학생들과 회사원 사이에 틈바구니에서 하염없이 서게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오토바이에 편히 앉아 다니던 몸으로는 적응에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2002년의 열기, 세월호 참사 때의 눈물, 평창 동계 올림픽, 이태원 압사 사고.... 온 국민이 함께 겪는 희로애락의 공감대가 있다. 뉴스를 챙겨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기에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다. 2024년의 나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지 못했다. 철저히 타자가 되었다.
호찌민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불확실을 뚫고 이곳에 왔기에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새로운 경험들 덕에 오감이 짜릿하게 열리는 순간들이 많다. 독립을 하고서야 비로소 홀로 우뚝 섰다. 현재 나는 행복하다(돈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매우 그랬고 지금은 80점 정도).
다만 잊지 말아야 한다. 삶에는 일시정지가 없다. 어떻게 느끼든 삶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니 시간과 건강이 바닥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절제하는 습관을 들이고 주변 이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마음껏 사랑해야 한다. 나중에 와서 이거 연습판 아니었냐고 억울해하지 말고.
여행은 끝이다. 정신 차리고 삶을 가꿔 나가야지. 마침 돈이 똑 떨어진 고로 강제로라도 정신이 차려질 듯하다. 오히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