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장래 Dec 25. 2023

인생은 베일리스 밀크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과장 좀 보태 모두가 나를 부러워했다. 매일 쌀국수와 반미를 먹을 수 있는 삶을,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를 부러워했다. 나는 고수 향에 예민한 사람이다. 포근한 기온은 좋지만 그게 33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소재의 한국국제학교에서 일하게 됐다. 많이 들어오는 질문들을 바탕으로 설명하자면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 어린이를 한국어로 가르친다. 고용휴직 상태로 2년 정도 나가며 연장계약이 가능하다.



나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터라 주변에서 축하를 많이 받았다. 특히 동료 선생님들께서 거기는 아동학대로 고소당할까 봐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하실 때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침몰하는 배에서 홀로 구명조끼 차림으로 탈출하는 기분이다. 2년 뒤에 타이타닉에서 다시 만나요 선생님들.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함도 있는데, 살아보니 보이는 그대로인 일 같은 건 없었다. 불행인 줄만 알았는데 뜻밖의 호재인 사건들이 있다. 완벽한 기회로 보이던 것들이 막상 얻어내면 골칫거리이기도 했으며, 대개는 복합적이었다. 아, 최근 나와 연이 있었던 베일리스 밀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눈을 번쩍 뜨는 습관이 있는 나는 칵테일 바에서 베일리스 밀크를 맛본 날 유레카라도 얻은 듯 눈을 치켜떴다. 고급스러운 달콤함이 위스키 향과 함께 어우러지는데 굉장히 내 취향이었다. 돈만 많다면 몇 번이고 시켜 먹고 싶은 맛이었다. 물론 나는 평범한 서민 -따져보자면 칵테일을 몇 잔 마신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호화롭게 인생을 살지 못하는 작은 간의 소유자-이었으므로 그러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칵테일 바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첫 잔은 베일리스 밀크와 함께하곤 했다.



궁상맞은 베일리스 밀크 사랑을 보다 못한 친구가 인터넷에서 제조법을 찾아주었다. 놀랍게도 재료는 술과 우유 단 2개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우유란 제주도의 감귤과도 비슷한 식재료였다. 잘만하면 공짜로 얻을 수 있다 이 말이다. 심지어 베일리스 아이리시 밀크(이하 베일리스)라는 위스키는 동네 대형 마트에서 파는 주종이었다.



우유부터 시작해 모든 상황이 운명인 것만 같았다. 학교와 동네 이마트에서 모든 재료를 손쉽게 공수해 왔다. 흥분한 마음으로 베일리스와 우유를 1:4의 비율로 탔다. 숟가락으로 베일리스 밀크를 휘저으며 희망에 부풀었다. 달짝지근하니 신선한 우유향이 나는 이 멋진 칵테일을 퇴근 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거구나. 알싸한 위스키에 연하게 취한 채로 밤을 보내면 얼마나 행복할까.













기대 가득 한 입 축인 자체제조 베일리스 밀크의 맛은... 애매했다. 이 맛이 맞는데 아니었다. 혓바닥에 처음 닿았을 때 느껴지는 차가움이 없었다. 달기만 해서 이게 음료수인가 싶을 때쯤 쌉싸름하게 올라오는 술의 밀당없이 처음부터 위스키가 호통을 치는 맛이었다. 미국에서 먹는 자칭 할머니 손맛 곱창전골을 먹는 기분이었다.




현재 베일리스 밀크와 내 사이는 애매해졌다. 굳이 집에서 또 해 먹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뻔히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칵테일을 술집 가서 만원 씩 내고 사 마시고는 싶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된 것이다. 천생연분인 줄 알았건만. 그렇게 베일리스 밀크를 잃었다.













베트남에서의 내 삶은 어떨까? 다들 좋을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삶은 베일리스 밀크와도 같은 법. 첫 생각을 뒤집고 틀고 흔들어서 결국 상상도 못 한 마무리를 맞이하는 것이 인생의 묘미이리라.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겠다는 겸허한 자세와 어쨌든 즐거운 이 순간을 누리며 닥쳐올 미래를 맞을 수밖에 없다. 2월의 베트남, 컴온.

작가의 이전글 이것은 어른의 똥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