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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Oct 02. 2021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아파 울겠지만.

트리트먼트 마감을 마쳐 한가로운 오후다. 제목은 내 기분과는 상관없다. 기분이 좋지도 슬프지도 않은 조용한 오전을 맞아 오랜만에 브런치를 쓴다. 다들 어떤 주말을 보내고 계시는지?


견딜 만한 불행. 오늘의 주제는 이거다. 견딜 만한 불행. 요새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번 시나리오에 나오는 중요 테마이기도 하다. 


요즘 친구들은 체리필터의 멋짐을 모르겠지...?
난 내가 말야, 스무살 쯤엔 요절할 천재일 줄 만알고.
어릴땐 말야 모든게 다 간단하다 믿었지

나도 그랬다. 최근 10살 어린 사촌동생의 대학 입학 자기소개서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때도 참 불행했었지. 그때는 대학을 가면 이 불행이 어느정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수능을 밑바닥까지 조지고, 입시때 처음 써 본 시가 대학을 붙여줬을때 난 내가 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 줄만 알았다. 그 자릴 원하던 그 수많은 학생 대신에 날 뽑은 이유는 어쩌면 나도 몰랐던 내 재능이 힘을 써준 것이 아닐까 하며 희망에 가득차 있던 어린 날의 나에게 뒷통수를 세게 갈겨준것은 우습게도 시 전공 첫 수업이었는데, 처음 써온 시를 거의 혹평이 아닌 무평에 가까울 정도로 까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넌 글 안쓸거지?”


하며 묻던 사람들. 오기에 차서 그날 10년치 신춘문예 시집을 사와서 읽고거의 매일 새벽 밤을 새면서도 응! 난 취직해서 잘 먹고 잘살거야 하며 자존심부리던 어린 날의 나. 마감과 새벽에 익숙해진 9년의 시간과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온 6년 정도의 시간, 끝나가는 이십대. 내가 내린 결정들과 누리는 삶. 생각해보면, 뒷통수를 치는 건 언제나 세상이 아닌 나였을지 모른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더니, 문창과 시험을 보고. 문창과에 기껏 보내놓았더니, 연극이나 내내 하고. 연극에 기껏 발 딛게 해주니 영화과를 가버리고. 영화과를 보냈더니 이제 스타트업을 한다. 스타트업으로 돈벌라고 하니 겨우 하루 출근하고, 정말 원하는 것은 입봉이라며 주 4일은 시나리오를 쓴다. 


내가 둘다 해봐서 아는데, 대학원=작가


이번 시나리오 인물 소개에 딱 나같은 놈이 나오는데, 여행작가로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을 잃은 이후에야 떠날 수 있던 제 다리의 의미를 안다. 우습게도. 그 놈을 내가 어떻게 설명해 놓았냐면. 


안전하지만 지루한 일생과,
위태롭고 공포스럽지만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일생 중에
내게 더 견딜 만한 불행은 어떤 것일까.
재영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다음날 재영은 식당에서 펜과 메모지를 훔쳤다.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이케아 몽당 연필보다 더 작은 연필로 그날의 여행기를 적었고
한국에 돌아와 사진도 없는 여행기를 팔았다.
3개월만에 14키로가 빠진 아들을 보며,
재영의 부모님은 재영이 비싼 인생 수업을 치렀다 말하며
다시 책상에 앉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재영은 안전한 삶을 살며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싸게 파는 작가가 되어있었다.

그동안 작가로서 내가 팔아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 나는 오기와 열등감이었던 것 같다. 작가로서의 특출난 재능도, 배우로서의 특출난 재능도, 감독으로서의 특출난 재능도 없다는 것을 자꾸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는데 “저 절필해요” 해도 아무도 모르는채로 그만두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10%의 천재들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퍼즐처럼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짜여진 세계가 아니라, 90% 보편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저분하고 어설프게 엮인 세상. 때로는 서로가 치졸해서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때로는 서로가 안쓰럽고 애잔해서 미칠 것 같은 세상들. 삶이 다난해서 힘들다가도 지루해서 힘들일은 없다는 점에 피식 웃는 불안함과 그러면서도 오늘 재밌는 일은 뭐가 없을까 하며 틱톡이나 뒤지는 사람들의 세상.


그런 세계를 그려서 잘 팔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내게 판다는 것은 기꺼이 이 노력이 돈을 받을 만한 자신이 있다라는 마음이니, 나는 내 작품을 판다는 말이 좋다. 언젠가 영화맛집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 브런치를 검색하는 태그 중에 영화감독 지망생이라는 태그가 많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내 마음을 적어 놓는다. 수능이 1달 남았고, 영화과, 문창과, 연극학과 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이 많을 것 같아서. 아직 모든 것에 지망생인 나는 이 삶이 내내 뿌듯하다고도, 내내 멋있다고도, 내내 행복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우나 이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


나는 이 삶이 내가 견디기에 제일 즐겁고 행복한 불행이라고 말하겠다. 다이나믹하고, 지루할 틈이 없다. 내 방에 앉아 나는 몇번이나 인생의 사랑과 헤어지고, 돌아오고, 누군가를 잃고, 죽이고, 삶을 다시 산다. 어제 내가 죽인 인물에 마음이 아파 울다가도 내일 그 인물의 죽음을 다룬 장면이 얼마나 죽이는지 배우 혹은 스텝들에게 피 튀기며 설명하고 신나 한다. 얼마나 지루할 틈이 없는 삶인가.


내가 가장 걱정한 삶의 불행은 오직 지루함이었으므로. 나는 이 삶이 맘에 든다. 수능을 망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왕배우의 재능을 가졌더라면, 미친 작가의 재능을 가졌더라면, 카메라만 대면 죽이는 샷을 뽑아내는 감독이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이 세계도 맘에든다. 


종종 세계가 뒷통수를 칠때 세계는 더 좋은 것을 가져다주려 할때가 있다. 그러니, 조금 더 견뎌보시라. 세상에는 정말 멋진 견딜만한 불행이 있다. 


힘내자 수능생 친구들아. 


그리고 내 사촌동생 다정아. 너 태어날때 삼촌이 곧 태어날 네 이름을 공모했었거든 그때 열심히 아는 한자 다 뒤지던게 생각이 난다. 넌 정말 세상에 多情하고 멋진 광고 기획자가 될거야 화이팅.




체리필터의 멋짐은 HAPPY DAY에서 나오는 부분

https://youtu.be/SeS8u9WG3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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