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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룡 Feb 07. 2021

무료로 나눔한 의자가 5만원에 팔렸다

당근마켓에 등장한 창조경제(?)


최근에 의자를 새로 구입하면서 기존에 쓰던 의자는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당시에는 10만원이 넘는 가격에 구매한 시디즈 의자였지만, 10년 가까이 사용하면서 많이 낡기도 했다.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지만 오랜 시간 먼지와 나의 땀을 비롯한 여러 얼룩들이 좌판에 찌들어 있었다.


버리려고 생각해보니 대형 폐기물로 분류되어 절차도 복잡하고 돈도 들었다.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최근에 당근마켓을 통한 중고거래가 핫하다고 하니, 여기에 무료 나눔으로 올리면 혹시 누군가 가져가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그런 얼룩진 의자를 누가 가져가!"


아내는 아무리 공짜라고 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수년간 내 땀으로 얼룩진 의자라서 아내조차도 그 의자에 앉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올려보고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면 그때 버리면 되니까. 비록 좌판이 더럽지만 아직 튼튼하기에, 누군가 좌판에 방석을 깔고서라도 쓸 사람이 있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당근마켓에 글을 올렸다. 내가 사는 지역으로 와서 가져간다면 무료로 주겠다고 하였다.




"당근! 당근! 당근! 당근!"


올리고 나서 30초나 되었을까? 순식간에 4명이 나에게 대화창을 열었다. 이러다가 수십 명으로 불어나서 답변하기도 어려워질까 싶어 일단 빠르게 '거래완료' 처리를 했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대화를 건 사람에게 의자를 주기로 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의자의 얼룩진 부분을 확대한 사진도 첨부했고, 좌판이 많이 더러우니 방석을 깔고 써야 할 것 같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더러운 의자를 달라고 하는 것일까? 혹시 의자를 받으러 온 사람이 의자의 상태를 직접 보고는 이렇게 더러운지 몰랐다며 나에게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잠시 후 의자를 받으러 온 사람이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한 남자가 중형 세단으로 보이는 차의 트렁크를 열어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차 안은 트렁크부터 뒷좌석까지 크고 작은 물건들로 가득 차 보였다. (사실 마스크를 쓰기도 했도 내가 당황해서 그런지 나이는커녕 남자였는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아.. 그.. 차에 공간은 있으신 건가요? 의자가 들어갈지 모르겠네요."


"그럴 줄 알고 제가 드라이버를 가져왔어요."


내가 당황해서 말했지만 그는 주머니 속에서 다양한 크기의 드라이버가 든 공구 세트를 꺼냈다. 그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차에 싣는 것까지는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나왔지만 당황한 나머지 그의 말에 쏜살같이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상한 생각이 들어 당근마켓을 켜서 그의 프로필을 보았다.


그는 옷부터 전자제품, 각종 액세서리까지 150여 개의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심지어 "새상품"이라고 쓰여 있는 옷들도 수두룩했는데 어떻게 개인이 이렇게 많은 중고 물품을 팔 수 있을까 싶었다. 적어도 그는 본인이 실제로 의자를 사용하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왜 이 의자를 가져간 것일까? 버릴까 고민하던 의자였기에 좌판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돈을 받고 판다고 해도 1~2만원이지 않을까? 팔릴지 안 팔릴지도 모르는 그 1~2만원 때문에 그는 차를 끌고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감수한 것인가?




다음 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당근마켓에서 그의 판매내역을 열어 보았다. 내가 판 의자는 없었다. 그런데 검색창에 '시디즈 의자'라고 쳐 보자 다른 닉네임에서 낯익은 의자가 등장했다. '5만원', '거래완료'라는 키워드와 함께.





내가 어제 준 의자가 분명했다. 색상과 모델, 그 얼룩까지 똑같았다. 더욱 확실한 것은 나에게 의자를 받아간 사람과 판매자는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고, 영어와 한글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사람의 다른 아이디임이 분명했다(한 아이디가 'Flower'였다면 다른 아이디는 '플라워'인 식으로).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내가 무료로 나눔한 의자로 이익을 취했다는 것에 대한 분한 감정과 동시에, 팔릴 줄 알았으면 나도 이 가격에 올릴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글에는 그저 '사용감이 있다'라는 말만 있었는데, 나는 버리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던 그 얼룩을 단순히 '사용감'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누군가는 겨우 몇 달 정도 쓴 의자라고 생각하고 구매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 다시 대화를 걸어 항의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내 집 앞까지 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150여 개의 물건을 팔고 있다면 그는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중고나라에서는 조직적으로 사기를 치면서, 피해자가 사기인 것을 알아채고 항의하거나 신고하면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이용해 전화테러나 배달테러를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항의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나는 의자를 무료로 나누어주었을 뿐 반드시 본인이 실사용하라는 조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료로 받았다고 해도 그 물건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그 물건을 가진 사람의 자유이다.


사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물건을 공짜로 준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5만원에 사겠다고 할 때, 그 사이에서 내가 5만원보다 작은 비용을 들여 조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이것은 진입해야 하는 시장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방법을 '차익거래'라고 하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그의 행동은 '창조경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마도 그는 당근마켓에서 무료로 나눔하거나 시세보다 낮게 파는 물건을 사다가 더 비싸게 되팔면서 수익을 얻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는 의자를 열심히 세탁해서 실제로 5만원의 가치가 있는 의자로 재생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물건을 받아다가 되파는 일만 한 것이라면?


분명 누군가는 중고 의자가 5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구매한 것이겠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누군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 나의 의자를 무료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누군가는 그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가 파는 물건을 샀겠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더 적은 가격에 그 물건을 살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중고시장에서는 간혹 사기를 비롯한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중고시장에 따뜻한 온정이 남아있다고 믿고 싶다. 중고 물건을 싼 값에 판다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본인이 쓰던 정든 물건을 다른 누군가가 잘 사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오늘도 평화로운 '당근마켓'과 '중고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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