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뒤 Sep 02. 2021

여름, 피클을 만드는 날

근사한 양식당 기분을 내 볼까

* 이 글은 오이가 싫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불편함을 끼칠 수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



 오이가 싼 계절이다. 작년에는 비가 한참이나 와서 오이 가격이 올라가더니, 올해는 7월에 무더위가 이어지고 비가 오는 날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런지 오이가 쌌다. 비닐 팩 한 봉지에 2천 원. 어떤 날에는 네 개, 어떤 날에는 세 개가 들어있고 운이 좋으면 다섯 개가 들어있는 봉지를 집을 수도 있었다. 


 나는 오이가 좋다. 몸에 열이 많아 여름이 되면 열을 내는 내게 오이는 얼음 대신 몸의 열을 식혀주는 존재였다. 그대로 잘라 쌈장에 콕콕 찍어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오이소박이나 겉절이, 랜치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에 들어간 오이도 좋아한다. 연어와 함께 캘리포니아 롤에 들어간 오이도 좋다. 얇게 채 썬 오이가 올라가는 냉면도 여름에 꼭 찾아먹는 음식 중 하나이고, 짜장면에 올라가는 오이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탕수육 소스에 들어간 오이도. 유일하게 별로였다고 생각하는 건, 오이 에이드 정도일까. 어쩐지 오이 마스크팩을 생각나게 하다 보니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손사래를 치게 되었다. 


 다행히 나는 오이 알레르기도, 오이를 싫어하게 된다는 유전자도 없어서 여름이면 오이 킬러가 된다. 하루 한 개, 어슷 썰거나 채 썰거나 깍둑 썰거나 혹은 썰지 않은 채로 껍질만 베이킹소다에 깨끗이 씻어서 먹을 때도 있다. 오이 꽁지를 소주에 넣으면 쓴 소주가 조금 달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전 실험 도서를 본 일이 있는데, 오이가 숙취에도 좋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라 책의 정확한 제목이 기억나지 않음을 양해 바란다. 마찬가지로 초등학생 아이가 술에 이것저것 넣어보면서 어른들을 에게 직접 시식을 요청하는 충격적이지만 귀엽고도 멋있는 실험 내용이었다. 시골에 가면 널려 있는 것이 오이였고, 아이스크림이나 찬 음료가 너무 찰 때 냉장고에 넣어둔 오이는 씹는 맛도 있어서 나에게 오이는 늘 호감이 가는 식물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오이는 금방 상한다. 물이 92%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냉장고 안이 너무 건조하면 오이가 쪼글쪼글해지고 너무 습하거나 세균이 번식하고 있으면 금방 물러버린다. 신문지로 싸서 보관하거나 하는 방법도 있고 요즘은 야채 보관 전용 플라스틱 통이 나오지만 한 푼이 아쉬운 자취생활에 금방 먹으면 되는 오이를 위해 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얼른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오이나 오이 반찬을 계속 먹기는 질린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말이나 소, 토끼가 아니니까. 


 첫 자취생활을 하던 시절 욕심껏 샀던 오이를 한방에 처리할 수 없을까, 그리고 오이가 비싸지면 먹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알게 된 것이 바로 피클이었다. 장아찌도 아니고, 서양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는 피클이라니! 마침 오이김치를 담글까 하다 액젓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을 때라 눈이 반짝 떠진 것 같았다. 

 

 피클을 집에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의외로 인터넷에는 피클 담그는 법이 아주 일상적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내게 피클은 반찬이라기보다는 중국집의 단무지 같은 존재였다. 단무지만을 위해 무를 집에서 절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어릴 때는 경양식집이나 피자가게에서 주는 피클이 다인 줄 알았고, 학교에 다닐 때는 파스타 가게와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를 다니며 수제피클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학 때는 개인 가게도 많이 가면서 피클을 즐겨 먹었다. 맛은 천차만별이었다. 음식에 소비하는 돈이 늘어날수록 내가 경험하는 오이피클의 세계도 넓어졌다. 예전에는 대부분 오이만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이제 피클은 오이를 주 재료로 하여 각종 아삭한 야채들이 잔뜩 들어간 야채 절임에 가까워졌다. 만드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한식에서 장아찌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접근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장아찌와 피클은 비슷하다. 간장을 넣느냐 넣지 않느냐, 어떤 향신료를 넣느냐의 차이만 있다. 보관 방법도 만들게 된 이유도 비슷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겨우 내 먹을 야채를 저장하기 위해 썼던 방법이다. 요즘에야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하게 먹지만 예전의 피클은 소금과 식초가 들어간 초절임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보관기간도 훨씬 길었다. 지금은 대부분 냉장고에 넣고 먹기 때문에 설탕을 넣어 맛을 가미하고, 향신료로 상하는 것을 막는 편이다.


 피클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전제는 물과 식초와 설탕, 그리고 소금의 비율이다. 물과 식초, 설탕을 2:1:1로 섞는다. 소금은 물 2컵당 1 밥숟가락(소복하게 쌓는 것이 아니라 깎는 느낌으로). 맛을 보고 너무 시고 달기만 하면 조금 더 넣는다. 향신료는 없다면 굳이 넣을 필요는 없지만 있다면 넣는 것이 좋다. 어디 근사한 양식집에서 수제로 만든 것 같은 향을 느낄 수 있다. 흔한 순으로 통후추, 바질 말린 것, 월계수, (여기서부터는 그다지 흔하지 않음) 정향, 코리엔더 홀(고수 씨앗), 타임 같은 것들을 넣는다. 귀찮다면, 인터넷에서 파는 피클링 스파이스를 사서 넣어도 좋다. 내 경우 그 재료가 다 집에 있어서 굳이 사지 않았다. 피클 물에 재료가 드러나도록 그대로 넣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깔끔함을 위해 미리 다*소에서 산 다시백에 넣어둔다. 


 야채도 집에서 만들면 마음껏 만들 수 있다. 올해 여름에도 이것저것 잔뜩 넣어보았다. 오이를 가장 많이, 파프리카, 당근, 양파, 무, 양배추, 아삭 고추, 할라피뇨, 청양고추, 마늘, 깻잎까지 넣었다. 친구들은 어디 급식업체를 하냐고 놀려대었지만, 내가 한 끼에 먹는 야채를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자취를 하며 야채를 아껴 넣는 것은 결국 남겨서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채와 피클 물이 준비되었다면, 이제 그릇을 준비할 차례다. 올해도 몇 개의 그릇 살균을 소홀히 했는지 작은 병 몇 개는 안에서 상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없도록 넓은 프라이팬에 키친타월을 깔고 물을 채운 후 병을 뒤집어서 끓이기 시작한다. 원래 병 살균은 커다란 솥에 물을 넣고 병이 잠기도록 넣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 그런 곰솥이 있기는 드물어서 증기로 살균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찬물부터 시작해서 물이 팔팔 끓을 때까지 10분 정도 충분히 증기를 쐬어주고, 잘 말려준다. 안쪽만 마르면 작업을 바로 시작해도 좋다. 어차피 병에 뜨거운 피클 물을 넣기 때문에 다 식지 않아도 된다. 


 피클 물을 팔팔 끓인다. 향신료의 향이 배도록 충분히. 작은 병을 여러 개 만든다면 물이 훨씬 많이 필요하다. 500ml짜리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유롭게 300ml가 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병 안에는 미리 야채를 차곡차곡 넣어준다. 빈틈이 적도록 넣는다. 너무 없으면 피클 물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 조심한다. 팔팔 끓인 피클 물이 한 김 식기 전에 천천히 병 안에 붓는다. 야채가 너무 많아 붓는 도중에 피클 물이 식는 것 같으면, 붓던 피클 물을 조심조심 따라내어 한번 더 끓여서 붓는다. 국밥의 토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야채를 한번 데워주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이다. 피클 물에 바로 닿는 가장 위쪽의 야채는 무나 당근처럼 잘 익지 않는 야채가 좋은데, 그 이유는 가장 먼저 닿는 곳의 물이 가장 뜨거워 양배추나 양파, 오이 같은 야채는 금방 익어버려 미묘한 맛의 피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을 잘 부었다면 80%는 완성이다. 야채가 잘 잠기도록 조금 눌러주고, 뚜껑을 꼭 닫는다. 그리고 야채 사이사이의 공기를 빼주기 위해 두어 번 정도 병 바닥을 부드러운 바닥에 툭툭 쳐준다.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 실패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 반드시, 꼭 잊지 말아야 한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 하룻밤 정도 그늘진 곳에 두고 냉장고에 넣은 후 원할 때 꺼내먹으면 끝. 피클은 여름에 연례행사처럼 만드는 반찬이라 라면에, 파스타에, 피자에 곁들여 먹다 보면 커다란 병도 없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다양한 야채를 사용하면 색도 예쁘다.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을 때 피클을 만들다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김치를 만드는 마음도, 밑반찬을 만드는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냉장고에 든든한 먹을거리가 있다는 충만감이다. 더운 여름에 차가운 반찬이 생각난다면 피클이 딱 알맞고, 각종 배달음식과도 궁합이 좋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름 내 식탁에는 피클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사실 겨우내 먹기 위해 준비하는 음식인데 여름이 가기도 전에 다 먹게 생겼다. 새큼하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달콤하고, 짭조름해서 간도 딱 맞아 한 종지를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음식. 레스토랑을 마음껏 가기 힘든 요즘, 피클과 함께할 때마다 양식당 느낌도 함께 났다고 하면 조금 오버하는 것이려나.


 




사진: pixabay - szjeno09190

매거진의 이전글 다 같이 그리워서, 수박화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