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데리고 온 선인장은 어쩐지 처음부터 비실비실했다. 아니다. 그냥 이건 내 평가일 뿐이다. 그 아이는 그냥 자신의 컨디션으로 있었는데, 내가 별생각 없이 그 아이를 방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식물들과 오래 함께했지만 나는 식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무심한 식물의 반려자였기 때문이다. 비교적 식물을 죽이지는 않지만 잦은 출장과 챙길 것을 잊어버리는 성격 덕에 집안의 식물은 꽤 많이 죽어나갔다.
가끔은 과한 관심이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 녹거나, 마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의 상태가 나빠질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딱히 대책도 없어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하루하루 줄기가 말라 가는 아이들의 상태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까 망설여지는 마음까지. 돌고 돌아 선인장까지 그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최대한 관심을 주지 않기로 했다. 원래 선인장은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선인장 또한 조심스러웠다.
녀석은 처음에는 물받이가 없는 넓은 유리 화병에 담겨 왔다. 세 종류의 다육이를 한 화병에 담는 원데이 클래스에 참가했더랬다. 선인장은 토끼귀를 단 것처럼 귀여웠고, 온실에서 갓 세상에 나와 연녹빛으로 윤기가 잘잘 흘렀다. 화병은 약간의 흙과 이끼. 그리고 두 종류의 다육이가 함께 있었는데, 그중 한 아이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말라버렸다. 함께 클래스를 들었던 다른 분들의 다육이도 마찬가지였다. 잎이 넓고 장미같이 생긴 흔한 다육이는 기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의외로 다육이, 선인장 같은 '물을 안 줘도 사는' 종류의 아이들에게도 적절한 관심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남아있는 것은 어렸을 때 즐겨 먹던 돌나물과 닮은 다육이 하나와 팔(혹은 귀)이 두 개 달린 선인장. 물구멍이 없는 화분에 키우는 것은 이 아이들을 죽이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한 대로 여행지에서 가져온 재활용 플라스틱 컵에 구멍을 뚫어 흙을 대강 채우고 분리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꽤 오랫동안 잊어버렸다.
그 녀석이 위치한 곳은 베란다에서 멀리 떨어진 식탁 위. 마치 가짜 선인장처럼 그 자리에 그냥 계속 있는 것을 보고는 한동안 나도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것 같다. 두 귀가 있는 토끼 모양의 선인장은 처음에는 포동포동하다 갈수록 바짝 말라 가시와 가시 사이에 골이 파였다. 회사에 같은 선인장을 키우고 계신 분들의 것 또한 있었는데, 일정한 온도와 천장의 LED조명 덕인지 녀석들은 통통하기보다는 얇고 길쭉하게, 아주 크게 자라났다. 그에 반해 내 선인장은 몇 달이 지나도 위로 자란 것이라고는 손가락 반 마디 정도뿐. 내 손이 무엇인가를 커다랗게 키우기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 아쉽긴 했다. 납작하고 길게, 애리조나의 선인장처럼 자라는 것이 좋은지 우리 집 아이처럼 그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좋은 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들도 딱히 물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데. 회사는 항온항습기가 돌아가니 조금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되었다.
겨울의 거실은 서늘했다. 실내 온도는 20도가 채 안되었고, 녀석에게는 꽤 힘들었으리라. 무사히 두 번의 겨울을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자란 것은 1cm 남짓. 주위의 다른 선인장과 비교해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봄이 왔을 때, 2년을 넘게 몸 담았던 플라스틱 컵에 대충 꽂혀있는 그 아이를 보고 좀 안쓰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집안 화분들의 대대적인 분갈이를 시작했다. 결국 내 애정이 또 식물들에게 독이 되어버린 조금은 슬픈 결말을 갖는 야심 찬 분갈이였다.
흙을 바꿔주었다. 커피 찌꺼기에 영양분이 많다는 속설을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흙에 잘 마른 커피 찌꺼기를 섞으니 색도 까맣고 향도 나쁘지 않았다. 커피가 비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인지 자신감에 넘쳤다. 집에 있는 네 개의 화분을 모두 분갈이한 후, 뿌듯한 마음으로 이틀을 보냈다.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은 삼일째 아침이었다. 어딘지 탁해 보이는 이파리 색이라거나, 왠지 흙이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일이라거나. 우리 집 식물들이 시들시들해지고, 흙에는 결국 고민하던 사이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버렸다. 선인장의 표면도 매끈하다가 조금씩 작은 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알코올을 뿌리면 괜찮다길래 흙에 알코올도 뿌려보고, 과산화수소수 3% 용액도 뿌려보고, 결국은 분갈이했던 흙을 죄다 다시 갈아엎을 수밖에 없었다. 이주 정도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특단의 조치는 과산화수소수였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상식으로 과산화수소수로 씻어 내린 후, 며칠간 서늘한 곳에 방치해 두고 흙은 모조리 버렸다. 다시 사 오면서도 한숨을 얼마나 쉬었는지. 통기를 위해 하이드로볼도 넣고, 마사토와 자갈을 인터넷 레시피대로 빵 반죽 배합 못지않게 조심조심 섞었다. 곰팡이가 핀 부분을 잘랐다. 토끼의 뾰족한 두 귀는 잘려나갔고, 하트 모양의 몸통만 남아버렸다. 나머지 녀석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조금씩 말라갔다. 잊고 살 때도 있었지만 문득 집에서 쓸쓸히 말라갈까 봐 차마 버리지도 못했다. 선인장이니까, 바싹 마르면 그때 떠나보내 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세 번째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집을 구하고, 집을 옮기고, 부서를 옮겼다. 새로 옮긴 집은 정남향. 바로 앞에는 감나무가 대봉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새소리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낮은 층수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베란다 곳곳에 식물을 기르는 모양이었고 숲에도 나무가 무성했다. 덜컹거리면서 우리 집에 실려 온 식물 중 일부는 선물 받은 아이들, 일부는 반려식물 클래스에서 데려온 이들이었다. 공기정화 식물이 많았음에도 베란다에 둔 것은 내가 행복하기보단 녀석들이 볕을 많이 받아 적응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 상태로 석 달, 혹은 넉 달이 지났을까. 한 녀석의 머리 위에서 자그마하게 미니 선인장이 태어났다.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서였는지 신기하고 기특한 것과는 별개로 좀 소름이 돋았다. 선인장의 생명력이란. 문득 이 녀석들에게 물을 준다면(흙에는 준 적이 있지만 물꽂이는 한 적이 없었다.) 뿌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도 없는 선인장이 살겠다고 몸을 먼저 키운 게 안쓰럽기도 했다. 작은 병에 물을 담아 랩을 씌운 후, 물 가까이에 몸체를 대어놨더니 어느샌가 기다랗게 뿌리가 생긴다. 하루 이틀 만에 길게 뿌리를 내린 선인장 조각을 보면서 왜 진작에 이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았는지, 흙에 뿌리가 내리기만을 기도했던 내가 바보 같아졌다. 조각조각 잘린 6개의 선인장은 그렇게 다 각자의 뿌리를 가지고, 다시 뽈록 거리면서 자라기 시작했다.
고마웠다. 한순간의 실수가 녀석들을 너무 오래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도 했다. 생명의 끈질김을 보고 있으면 조금 더 힘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식물은 가끔 너무나 연약해서 보고 있기 힘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 더 크겠다고 손을 뻗는다. 내 과한 애정이나 갈데없는 무심함이 그 아이들을 앞으로 망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