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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뒤 Mar 26. 2022

한낮의 마법소녀

사랑이 세계를 구하는 세상 1

 여자아이라면 무릇 마법소녀에 한번 빠지는 시기가 온다. 안 온다고 해도 뭐, 이상한 일은 아니다. 텔레비전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 집도 있을 것이고 현생이 바빠 2D 캐릭터들에게 이입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의 여자아이들에게 마법소녀는 일종의 문화이자 롤모델이었다.


마법소녀는 대부분 평범하다.(고 주장한다)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 성적도 그럭저럭. 남자 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과 동경하는 선배, 매일 싸우는 소꿉친구(이지만 남자),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 무리. 그 여자애 무리 중에는 스포츠걸과 모범생이 섞여있다. 현실이라면 그 둘이 베프로 어울리는 일은 흔하지는 않다. 그럭저럭 화목한 가족이라던가. 대개는 90년대에 가졌을 법한 전형적인 일본 문화와 가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단독주택 한 채를 온전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늘 1층이나 2층에 세 들고, 혹은 아파트에 살았던 아이들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우연히 길에서 다친 동물을 구해줬다가 보은으로 마법소녀가 되거나, 반 강제로 마법소녀가 되거나... 여러 가지 사례는 있지만 대부분 그들에게는 도우미가 있다. 외계인이나 요정이다. 외계인이나 요정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 세계'의 것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날아와 소녀가 사는 세상을 구하라 한다. 그 순간부터 소녀는 특별해진다.


나는 한창 마법소녀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면 조금 부끄럽긴 한데, 사실 지금도 마법소녀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실 여자아이들은, 특히 사춘기 전후의 여자아이들이란 사회의 최약체에 가까웠다.(이렇게 이야기하면 '페미니스트'라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툭하면 아들에게 애정 순위를 밀리고, 학교에서는 늘 얌전하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슬슬 사춘기가 되면 체력도 남자애들보다 후달린다. 장난을 치면 드세다는 이야기나 듣고, 로봇이나 과학을 하면 되바라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어렸을 적의 이야기니 지금 아이들에게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세대를 지나고 강산이 두 번은 바뀌었을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녀들은 부모와 학교와 사회의 눈에 재단된다. 그래서 80년대 중후반, 그리고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자아이들은(그 아이가 백말띠라면 더더욱) 마법소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대체로 마법소녀들은 결국 크면 미녀가 되고, 사랑을 쟁취하며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동료와의 우정을 만들어 낸다. 내가 당장 이루어 낼 수 없는 것들을 마법소녀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루어내고 영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 다시 평범한 학생, 혹은 주부, 혹은 직장인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힘순찐이 아닌가!


선과 면의 세상에서는 소녀들에게 희망찬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고 열정을 가졌다가는 커가면서 사회에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여성 선구자들이 나오고, 사회는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는 집이 많은데 희한하게도 나에게는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에게 여자가 여자다운 것을 강요한다는 소녀들의 주제곡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헤쳐나간다.


누구나 자신의 최애 마법소녀 하나는 품고 산다. 아버지가 교수이고 새 부리 모양 지팡이를 들고 날아다니는 소녀든, 머리에 쓴 왕관을(그때는 그 왕관이 복선인지 몰랐지.) 달의 힘이라며 부메랑으로 날려버리는 만두머리 소녀든, 분홍머리로 숱이 잔뜩 들어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소녀든.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스스로를 마녀라고 부르는 소녀들이나, 이쯤되면 마법소녀가 아니라 최종병기에 가까운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나오는 소녀들도 있다.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소녀들이라는게 좀 아쉽긴 하다. 하긴 한국의 여자애들이 마법소녀가 될 만큼 천진난만함을 갖추고 있는가, 그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가 하면 또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 다음 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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