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남는 건 사진만이 아니다

두 번째 취미: 여행 기록

by 비온뒤

"남는 건 사진뿐이지"

휴대폰이 많이 보급되기 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카메라를 참 좋아했다. DSLR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부터 자동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좀 사는 집이라면 캠코더를 구비해 놓기도 했다. DSLR이 보급되자 신세계가 열렸다. 정말로 "남는 것이 사진"인 시대가 온 것이다. 예전이라면 영수증이나 티켓을 모으는 사람을 '여행에서 그런 거라도 남겨야지'하고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이제는 '사진을 찍으면 되지 뭐'하는 생각이 더 우선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뒤따라 가지 못하는 사람인 것도 같다. 물론, 여행을 가면 사진을 많이 찍는다. 내 경우에는 인물 사진이 아니라 주로 풍경 사진이나,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리라거나, 그 도시의 꽃과 나무들, 지나가다 만난 고양이 같은 '사람'이 아닌 사진이 훨씬 많다. 3박 4일 여행을 가면 최소한 500장은 찍어 온다. 그 안에서 흔들렸거나, 조도가 맞춰지지 않았거나 하는 사진을 제외하면 더 남는 사진은 더 적어진다. 사진 찍기에 집착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다만, 디지털 사진이라는 존재의 한계는 슬프게도 그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단편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내가 이런 것을 봤나? 먹었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뿐이었다. 혼자 여행을 자주 가니 마음 놓고 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기에도 뭐 했다.


아마 나의 여행일지는 그렇게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 내 다이어리의 자유 노트에는 여행기록이 가득하다. 출장을 가게 되어도 티켓은 꼭 챙기는 편이고, 정산과 기록을 위해 영수증이나 가게의 명함을 받아오기도 한다. 그런 기록들은 때로는 번거롭게 느껴지지만, 대체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편이다. 여행일지는 기념품 살 돈도 없었던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최고의 기념품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여행 기록을 시작한 것은 08년, 처음으로 '내일로'라는 제도를 이용했을 때였다. KORAIL, 한국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던 그 제도는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를 저렴한 가격에 7일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교통 패스였다. 입석으로 밖에 탈 수 없기 때문에 경부선에서는 대부분 서서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가한 시간대에는 기차여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제도였다. 내가 이용했을 때에는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직접 발로 뛰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은 자료집을 들고 다녔다. 많은 장소를 갈수록 이득이었기에, 경부선과 강원선, 장항선까지 대한민국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자료집에 다음 목적지와 지난 목적지의 감상을 짧게 남기게 되었다. 그때의 재미는 곧 다른 여행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는 기록 덕후의 자질을 발견하게 되었다.


절정을 이룬 것은 미국 일주 여행 때. 처음으로 혼자 한 해외여행이 북미 대륙이어서, 여행 초반의 나는 예민하고 겁이 많으면서도 눈치가 없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초보 여행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뻔뻔하게 버텨내기도 했다. 그때의 기록은 자세하다. 자금이 없어 힘들었고, 카메라는 늘 말썽이었다.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지역도 많았다. 다행히 미국은 다양한 관광안내 팸플릿이 제공된다. 그 팸플릿들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 부피를 줄이기 위해 내가 원하는 부분만 자르고, 뜯고, 붙이고, 그 주위로 글을 적는 나를 보며 같은 숙소(주로 게스트 하우스)를 쓰는 이들은 신기해했다.


내 여행에 꼭 포함되는 일명 '문구류 세트'가 있다. 스카치테이프처럼 생긴 얇은 양면테이프, 작은 사이의 딱풀, 그때그때 여행지에 어울린 마스킹 테이프, 스티커 몇 장과 라인 펜, 삼색 볼펜과 짜리 몽땅한 12색 색연필. 현지에서 문구류를 구하기 쉽지 않으니 옷 한 벌을 덜 챙기더라도 꼭 들고 다니는 것들이 되었다. 원하는 때에 나에게 익숙한 펜으로 글을 쓰고 가끔은 그림도 그리고, 색을 입힐 수 있다. 무게도 무겁지 않으니 더 좋다.


좋은 점도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점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여행기록을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에 한 여행일수록 그렇다. 친구들과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부모님께 이야기를 들려드릴 때 정성스럽게 기록한 것들이 있으면 보는 이들의 마음도 흥미진진해진다. 거기다 여행기록을 컴퓨터나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하면 더 좋다. 만질 수 없는 것들과는 달리 여행기록은 티켓이나 영수증, 혹은 길에서 주운 낙엽도 보관할 수 있다. (낙엽은 죽은 식물이기는 하지만, 해외여행이라면 세관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들고 갈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폐기하면 된다. 나는 주로 한국의 가을 낙엽을 많이 줍는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된다.


반대로, 나쁜 점이 있을까? 여행지에서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하지만, 혼자 여행을 갔을 때는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공간에서 글을 쓰는 저녁시간이 결코 아쉽지 않다. 어차피 밤의 거리는 혼자 다니기에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함께 갔을 때는 각자 씻고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동안 기록을 남긴다. 가끔 오늘 간 곳에 대한 대화도 남긴다. 다만, 그런 기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여행을 갈 때는 조금 눈치를 봐야 하긴 한다. 티켓이나 증거물에 대한 강박관념이 남는, 아주 약간의 단점도 있다.


시간이 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기록을 하는 것은 내 손으로 무언가를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겠지, 하고 생각하면 든든해진다. 일 년을 조심조심 잘 살아낸 내 다이어리 안에, 혹은 노트 안에 여행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는 것. 이만하면 훌륭한 기록 덕후의 자질 아닐까?




나만의 여행 기록 방법


1. 영수증은 꼭 챙긴다! 가능하면 손 영수증도 챙기는 것이 좋다.


2. 정산은 꼭 한다. 돌아와서 내가 얼마나 썼지?! 하고 우울해하지 말고 하루치의 예산을 꼭 챙겨 놓는다. 여러 번 정산하는 습관을 들이면 다음 여행 짤 때 도움이 된다.


3. 들렀던 식당의 명함은 꼭 챙기는 편(특히 맛있었던 식당!)


4. 팸플릿 안에서도 내가 좋았다고 생각되는 곳의 사진만 오려 붙인 후, 내 나름대로의 설명을 덧붙인다. 약간의 역사 지식도 함께 붙이거나 써 놓으면 좋다.


5. 여행지의 관광안내지도(작은 버전)를 구해서 내가 갔던 경로를 표시해 본다. 이렇게 해서 붙이면 가이드북의 향기가 물씬 풍기게 된다. 어쩐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많이 한 느낌.


6. 가위나 칼은 가능하면 소지하지 않는다. 대신 손으로 찢는다. 가위나 칼은 잘못하다 기내 캐리어에 넣기라도 하면 면세점 쇼핑하다 불려 가는 경우가 생긴다.


7. 물, 맥주 같은 음료 라벨도 쏠쏠한 기념품이 된다. 끝에서부터 살살 떼어내 보자.


8. 마스킹 테이프는 가능하면 얇은 것(폭 1cm 정도)과 보통 것(1.5cm 정도)을 둘 다 들고 다니면 좋고, 여유가 된다면 한국 느낌이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하나 챙겨 다니면 외국인들과 만날 때 한국을 알리는데 꽤 좋다. 다이소에서 3개 천 원 하는 그 마스킹 테이프도 물론 ok!


9. 어릴 때 동전을 아래에 놓고 연필로 문질러 본을 떠 내던 그런 방법도 꽤 좋다.


10. 기록을 남기는데 부담 가지지 않을 것.


나는 하루하루 일기 형식으로 남기는 것을 선호하지만, 해시태그(#)나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모티콘을 사용해 보기도 한다. 다만, 너무 피곤할 때는 붙일 것들만 붙여놓고 아주 중요한 것들만 간단하게 기록한 후 쉰다. 사진이나 기록물이라는 백업 파일이 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의 편차는 기록하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2020년 1월, 코로나 직전 갔던 미국에서의 한때. 미국 물 브랜드인데 폴란드 스프링.. 한국의 덴마크우유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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