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기를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선생님이 매일, 혹은 한주에 한 번 씩 검사를 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보니 누군가에 대한 솔직한 심정(예를 들면, 욕이라던가)을 쓰기도 애매하다. 초등학생 때의 내 하루는 대부분 학교 수업과 학원으로 범벅된 금금금금금토일의 연속인데. 순풍 산부인과에 나온 미달이 처럼 방학 막바지가 되면 언제나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짜내어 일기를 두세 줄로 마무리하곤 했다. 그림일기를 쓰던 것은 1학년, 2학년 때가 다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어서 사진을 매일매일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기본적으로 '오늘만 산다' 주의의 사고뭉치 어린이였기 때문에, 일기 쓰기는 늘 고역이었다. 일기에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하지?
얼마 전 유세윤 씨와 유민하 군의 일기를 엮은 책, '오늘의 퀴즈'가 출판되어 나왔다. 방송으로 일기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 아버지의 애정과, 그런 애정에 열정적으로(혹은 조금 귀차니즘을 발휘하며, 혹은 기발하게) 화답한 아들 덕분에 매일매일의 기록이 늘 즐거웠을 것이다. 아이의 일기를 보면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 일기란 즐거운 하루가 즐거웠다고, 아니면 힘든 하루가 힘들었다고 기록하는 일이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은 너무 괴롭지 않겠는가. 유민하 군이 학교에서 일기에 대해 어떤 결과를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도, 그 아이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기란 그런 것이 되어야 했다.
연말이 되면 온라인 쇼핑 문구 쇼핑몰에 상위 검색어를 차지하는 것이 항상 '20XX 년 다이어리'다. 물론, 나도 항상 내게 꼭 맞는 다이어리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헤맨다. 내게 필요한 다이어리의 조건은 꽤 까다롭다. 최근에는 몰스킨과 스타벅스가 합작해서 발매하는 다이어리를 계속 쓰고 있다. 정기적으로 가니 따로 돈 들일 필요 없는데 반해 대부분의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매년 다르고, 깔끔한 구성 위주다. 내지 자체의 지루함은 간지에서 보완했다. 늘 내 안의 다이어리 점수 10점 만점에 7~9점을 차지하는 다이어리가 되었다.
1. 자유 노트가 많을 것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 몰스킨 다이어리들이 이에 속한다. 최소한 50페이지가 넘어야 1년간의 내 TMI를 견딜 수 있다.
2. 월간 계획과 주간 계획이 있고, 주로 월간+주간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
다만 최근에는 월간이 앞쪽에, 주간이 뒤쪽에 있는 다이어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 가름 끈이 있을 것
없는 것보다는 낫더라.
4. 표지가 두껍거나, 최소한의 방수처리가 되어 있을 것
카페에서 글쓰기를 즐기거나, 텀블러가 새서 엉망진창이 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5. 날짜는 가능하면 월~일 순서일 것
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다
6. 가격은 20000원 미만일 것
비싸면 아까워서 들고 다니기가 힘드니까. 보통 13000~16000원 대의 다이어리라면 1년을 잘 버텨낸다.
7. 중간 사이즈 핸드백에 들어가는 크기일 것
A4 크기의 스케줄러는 크고 보기 편하지만, 휴대성이 엉망이다.
8. 너무 컬러풀하거나, 너무 심플하지 않을 것
너무 요란하면 처음에는 예쁘지만 쉽게 질리고, 공간 구성이 좋지 않을 경우가 많다. 프린팅 된 부분은 펜도 잘 먹지 않는다. 너무 심플하면 사무용 다이어리 같아서 숨이 막힌다.
9. 수납 포켓이 있는 것
그때그때 붙이지 못한 티켓이나 엽서를 넣어놓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10. 자주 사용할 때 가운데 제본되어있는 부분이 갈라져서 종이가 따로따로 분리되지 않을 것
생각보다 많은 다이어리가 이에 해당한다. 한번 산 다이어리 중 이런 경험을 가진 다이어리 브랜드는 그다음부터는 사용하지 않는다. 펼치는 횟수가 하루에 네다섯 번은 되기 때문에, 상반기가 다 끝나지도 않아서 종이가 분리되는 경험을 한 적도 있다.
다이어리(여기서 말하는 다이어리는 '일기장'으로서의 다이어리가 아닌, '일정표'로서의 다이어리다.)를 쓰는 것은 내 오랜 희망사항이었다. 중학교 때의 나는 우울했고, 고등학교 때는 입시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또 다른 방향으로 땅굴을 파고 있었다. 비록 원하던 대학에 가지는 못했어도 대학교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는 입학 선물로 매일매일을 기록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열아홉 살 이후로, 1년의 마무리와 시작은 늘 새로운 다이어리와 함께하고 있다. 어떤 해에는 매일을 기록할 수 있는 형태의 다이어리를 구매해서 최대한 일기를 쓰기도 하지만, 요즈음에는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두께를 가진 다이어리로 주간에 생각한 것들을 노트 형식으로 간단하게 적는다.
14년도부터 해마다 쓰는 다이어리들! 2017년부터는 왜인지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쭉~ 쓰고 있다. (자주 가서 그런가)
내 다이어리는 여행 기록을 담은 일지이기도 하다. 다이어리가 생기기 전에도 영수증이나 티켓을 모으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 습관이 그대로 다이어리에 이어진 것이다. 영수증도 모았었지만, 휘발성 잉크라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 버리는 점에 그다지 효용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복사를 해서 붙여도 되지만, 늘 복사를 할 수 있는 환경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행지의 영수증을 붙이고는 있지만 내용에 그리 집착하지는 않는다.
가계부의 역할도 겸한다. 사실 이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하루하루 사용한 금액을 적어 놓는 것은, 의외로 그때의 내 기분이 어땠는지를 말해준다. 무엇인가를 충동구매한 날은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폭발한 날이고, 지출이 늘어나면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거나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증거고, 명절에는 교통비가 늘어난다. 물론 여행에서의 가계부도 꼼꼼하게 항목별로 정리한다. 나중에 다른 여행을 갈 때, 일정이나 경로, 해야 할 일 같은 것을 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연말에는 한해의 지출과 지난해의 지출을 비교하기도 한다. 가계부를 쓴다고 지출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내 소비습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친구들을 만난 날, 대자연이 찾아오는 날, 교대근무의 쉬는 날, 수업일. 그것들을 손으로 정리하다 보면 지금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조금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달이 시작할 때마다 지난달에 까먹은 것은 없는지(특히 공과금!) 이번 달 목표는 무엇인지. 누군가의 생일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떠올린다. 매일매일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형태의 다이어리는 아니지만, 힘들거나, 억울했거나, 혹은 정말 기분 좋았던 일들을 문장 하나로 적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보았을 때 피식, 웃게 하는 나만의 경험집이 된다.
한 해가 마무리될 때엔 다이어리도 두꺼워진다. 다이어리 뒤쪽의 자유 노트는 보통 여행일지로 이용된다.
내 다이어리는 다이어리 꾸미기를 즐기는 사람들, 일명 '다꾸족'의 다이어리보다는 훨씬 허접하고, 깔끔하지도 않고, 내용도 일관성 있지는 않다. 다만 내가 편한 나만의 기록이기에, 몇 년간 모아 온 다이어리를 보면서 뿌듯할 때가 많다. 10년 후에, 오늘의 다이어리를 보며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매년 다이어리 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조언
일별로 쓰는 다이어리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페이지가 많고 양장으로 마무리된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것은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고, 결국 집에 두고 다니는 날이 훨씬 많아지게 된다. 비닐 커버(여름에 물에 젖은 경험, 커피를 쏟은 경험이 있다면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로 단단히 마무리된 얇은 주간 스케줄러(휴대폰보다 조금 긴 정도의 사이즈를 가진 것들)를 먼저 사용해 보는 것도 좋다. 주간이 아니면 월간도 나쁘지 않다. 주말에 약속이 많거나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라면 금-토-일-월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나의 약속, 그날의 기분(이모티콘으로 적으면 더 재미있어진다.)을 적거나, 맛있었던 식당이나, 예뻤던 카페를 적어보는 것도 좋다. 공간이 더 있다면 문장으로 만들어도 되지만, 처음 적는 사람들에게는 30자 정도의 문장도 부담 우니까, 단어부터 시작해서 차차 적는 분량을 늘려나가는 것이 편하다.
라인 펜(형광펜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양한 색깔을 가진 펜들)을 이용해서 다이어리를 조금 생생하게 꾸미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깔끔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사무실에 상비되어 있는 흑, 청, 적의 삼색 볼펜이 제격이다. 단, 월간 다이어리를 적을 때 깔끔하고 싶다면 펜은 늘 같은 굵기를 쓰는 것이 좋긴 하다. 글씨체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손으로 적는 것은 휴대폰으로 작성하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적으면서 내 생각이 정리된다. 틀린 곳이 있어서 두 줄을 그었다면 그것대로 의미 있는 기록이 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니 조금은 솔직해져도 좋다. 나는 화가 났던 일에 대해 많이 적는다. '안네의 일기'처럼 일기에게 하는 하소연이다. 다른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니 건설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저런 것을 하기에 나는 도저히 습관이 들지 않는다 하는 사람들에겐 휴대폰 달력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단, 그 기록을 다시 찾아보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10년 후에도 그 기록들이 내 손에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다이어리를 가지고 다니기 싫은 사람들이라면 베개 옆에 펜과 함께 두자. 3일에 한 번은 신경 쓰여서 보게 되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 일주일, 한 달 쓰지 않았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때부터 조금씩 또 쓰면 되니까. 다이어리에 완벽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