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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different way Jul 30. 2021

시 한 편에 인생을 담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서평


시가 함축적이라는 특징은, 학창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듣던 말이다. 상세하고 긴 글이 읽기도 쓰기도 편한 나에게 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너무 함축적이라 정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뭐였을까?를 생각하기가 까다로운 시들이 있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시인이 중의적으로 표현한 단어들의 의미 이해가 알쏭달쏭한 경우도 있고... 시속 화자를 통해 언뜻 비치기는 하지만, 시인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워 시인이 은밀하게 감추어 놓은 그 속내를 속속들이 알기도 어려워서... 사건의 단서들을 여기저기 흘려놓았다가 결말에 이르는 동안 다 찾아 줍게 되는 소설이나 수필에 비해 시는 내 마음을 확 사로잡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이런 불편함들이 오히려 시의 매력이고, 시라는 장르 그 자체일 텐데, 뭐든 확실하게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내 융통성 없는 성향이 멀쩡한 시를 평가절하하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읽다가, 뭔가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혹은 여긴 무얼 의도하고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화장실에 갔다가 뒤처리를 말끔히 못한 것 같은 그런 어정쩡한 느낌 때문에 시는 뭐 원래 그렇지...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대학 때 교수님이 쓰신 이 책을 읽으면서, 맞아~ 시는 원래 이런 매력이 있었지!라고 다시금 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름하여,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교대 다닐 때 문학 교수님이셨던 정재찬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다.


책은 총 일곱 챕터로 나뉘어있고, 각각의 챕터들은 우리네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상적이지만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묵직한 주제들로 구성했다.



1장... 밥벌이(생업 & 노동)

2장... 돌봄(아이 & 부모)

3장... 건강(몸 & 마음)

4장... 배움(교육 & 공부)

5장...사랑(열애 & 동행)

6장...관계(인사이더 & 아웃사이더)

7장... 소유(가진 것 & 잃은 것)



시는 유리창과도 같습니다. 닫힌 문으로는 볼 수 없던
바깥의 풍경들을 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리창은 소통의 통로이자 단절의 벽이기도 합니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 바람의 숨결을 직접 느끼는 것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시를 읽으며, 시를 통해 본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온몸으로 경험할 것인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관망만 할 것인지는, 독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제 40대 중반... 인생을 조금 알게 된 걸까... 책 속의 시들이 마구 가슴을 후벼 판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울컥 목이 메이기도 하고, 가슴이 저릿저릿,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한다. 시 속 인물들의 상황이 내 것인 양 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음을 울렸던 시 몇 편을 소개하고 싶다.



모일(日)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앞에 늘 붙는 관사(冠詞)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를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 옷만 입을 가부냐.

다만 두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 


그(박목월)에게 시인은 명사가 아니었던 것, 곧 '시인답다'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시인답게 사는 박목월, 그것이 그의 지표가 아니었을까요?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형용사인 시인이라는 신분말입니다. 그 신분을 지키기 위해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완벽주의자처럼 세심하고 까다롭게 언어를 다루는 언어의 장인, 목월은 언어의 헤파이토스입니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서] 



1장 밥벌이에 나오는, 박목월의 시, 모일. 박목월에게 늘 붙어 다니는 관사 시인. 관사는 스스로 쓰일 수 없고 명사 앞에서 그 명사의 성질을 결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박목월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해주는 관사 시인. 저자에 의하면, 관사의 관을 갓을 의미하는 단어로 시인 박목월이 시인이라는 갓을 쓰고 험난한 세상살이(비 오는 거리) 한가운데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인이라는 업이 세상 풍파를 다 막아내기에는 작지만 두 발이 젖지 않도록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눈물겹다는 가슴 찡한 고백... 언어의 헤파이토스라는 표현이 딱 적격이다. 이 모일이라는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분명, 예전에도 아는 시였을 텐데... 저자의 해석으로 다시 보는 모일은, 박목월의 고맙고 눈물겨운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나의 평범한 날들... 내 두 발이 젖지 않게 해주는 나의 업에 대해서도 나는 고맙고 눈물겹게 생각하고 있는지...



성장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2장 돌봄에 나오는 성장이라는 시. 파도가 넘실거리는, 물결이 뒤엉키는 모습을 마치 엄마가 자식을 떠나보내고 돌아서는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는 시인의 필력에 감탄 또 감탄.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수만 가지의 일들이 시인의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시영 씨의 시를 보고 난 이후에,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도, 잔잔한 호수도,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도 모두 그저 그런 물로 보이지가 않는다.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이 우리네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쉬이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언젠가 나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 사춘기 아들 딸들을 보내고 조용히 산골로 홀로 돌아와야 하는 그 순간이 오겠지... 하는 마음에, 벌써부터 가슴이 시큰거린다.




식사법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 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 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 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3장 돌봄에 나오는 인생 식탁의 식사법. 식탁에서 흔히 접하는 음식들을 소재로 삶을 써 내려간 시. 콩나물처럼 익힌 마음, 식빵 가장자리 같은 고통, 성실의 반찬,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 멸치 똥 같이 낭비해버리고 싶은 날들, 수저처럼 몸을 가지런하게 하여 한 모금의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어느 단어 하나 버릴 수 없는... 꼭꼭 씹어 삼키며 읽게 되는 식사법이라는 시. 물 한 모금 넘기며 한 번의 식사를 갈무리하듯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물 한 모금처럼 잘 넘기라는 당부로 시를 마무리했다. 콩나물, 멸치로, 생선, 수저로 한상 차려내고 그 식탁에 인생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젊음의 반대말도 아니고, 젊음이 모자라거나 사라진 상태도 아닙니다. 늙음은 젊음을 나이테처럼 감싸 안고 더욱 크고 푸른 나무가 되어 쉴만한 그늘을 드리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공부는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다. 대학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양, 고3 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억압 속에서 눈뜨면 공부, 눈을 감는 순간에도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선잠을 자는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대학에 들어가면 내 인생의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았지만, 대학은 그저 고등학교보다 조금 더 큰 학교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니, 공부는 대학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의 말처럼 늙음은 젊음의 반대말도, 젊음이 사라진 상태도 아니다. 인생의 진짜 공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시작이었고, 여전히 인생을 배워가는 중이다. 직장에서의 경험, 결혼 이후 생판 모르는 남과 부부가 되어가는 과정, 연습 없이 부모가 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여전히 나는 인생이라는 학문을 갈고닦는 중이다. 인생 학교에서 점점 더 고학년이 될수록 저자의 말처럼 내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나이테로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에게 쉼과 안식을 주는 아름드리나무가 될 수 있겠지... 여전히 나는 재학 중이다.


사랑론


사랑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때 한 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때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저자는 '사랑하다'와 '생각하다'가 원래 한 뜻이었는데, '사랑'이란 우리말의 어원은 확정된 바가 없다고 한다. '생각하여 헤아리다'라는 뜻의 '사량(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시인은 내친김에 '사량(思量)'을 '생각의 분량'으로 풀어본 것이라고 추측했다. 시인은 사랑이 생각의 바다, 생각의 산맥, 생각의 우물, 생각의 나무,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던 소중한 이가 있기에 이 시인의 사랑론은 절로 공감이 된다.


전 국민의 고막 남자 친구인, 폴 킴은 [시는 나보다 더 나다운 말로 절묘하게 찾아 들려준다. 이 책에서 당신도 나처럼 인생을 바꿀 시, 인생을 바꿀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글로 추천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의로는 당해낼자가 없었던 명강의의 일인자였던 교수님을 책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책에 나와있는 시들을 읽으며 시와 폭 사랑에 빠졌다. 함축적이라 매력적이지 않았던 시가 함축적이라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나란 인간 참으로 이중인격자일세...


인생이 고달프고, 녹록지 않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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