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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상 Oct 23. 2019

철수세미와 그들의 세상

 

"야, 근데 우리 지금 왜 술 먹다 말고 청소를 하고 있는겨?"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발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던 김진솔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에 철수세미로 인덕션을 벅벅 문지르던 나와 물티슈로 온 방안을 쓸고 닦던 박지원은 물끄러미 김진솔을 바라보다 덩달아 따라 웃었다. 새벽 세시, 고요히 잠든 왕십리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웃고 또 웃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아무리 떨어져 살아도 분기마다 한 번씩은 보던 김진솔과 연말을 맞아 만나기로 하였고, 졸업전시 준비 도중 마침 하루 정도 여유가 생긴 박지원이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는 늘 그렇듯 왕십리에 사는 김진솔의 자취방으로 모였고, 모처럼 뭉쳤으니 바깥 음식도 좋지만 집에서 근사하게 만들어 먹어보자는 김진솔의 제안에 근처 마트에서 식재료를 바리바리 사들고 와 주방 앞에 섰다.


셋이 모이면 주로 요리하는 역할을 맡는 내가 그날도 지휘봉을 잡게 되었는데, 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약간의 결벽과 아주 조금의 강박을 지닌 내 눈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노랗고 빨갛고 거무스름한 각종 양념과 기름이 원룸용 인덕션 위에 켜켜이 쌓여있었고, 김진솔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프라이팬에는 지난 요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한 번 청소를 시작하면 집을 한 번 뒤집어엎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을 잘 알기에 나는 수많은 유혹을 물리쳐야 했다. 결국 나는 사태의 심각성에 무릎 끓고 애국가를 한 세 번 정도 부른 끝에 그릴 샌드위치와 바질 크림 파스타를 무사히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언제나처럼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과 술을 늘어놓아야 만족을 하는 김진솔과 박지원, 그리고 나.


샌드위치와 파스타는 생각보다 훨씬 맛이 좋았고, 내가 청주에서 고이 모셔온 각종 술들도 한잔 두 잔 곁들이다 보니 다들 배가 부르고 취기가 돌아 붕 뜬 기분이 되었다. 김진솔의 집 앞에서 산 맥주부터 아빠의 진열장에서 몰래 빼 온 위스키까지 온갖 술을 마시던 우리에게도 나름의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주종이 바뀔 때마다 맛이 섞이지 않도록 술잔을 한 번씩 씻는 것이었다. 


맥주를 다 마시고 담금주를 마실 차례가 되어 나는 잔을 씻기 위해 싱크대로 향했고, 주방에 선 순간 애국가의 힘으로 겨우 물리쳤던 유혹을 다시 마주하고야 말았다. 이제 어느 정도 먹을 만큼 먹고 마실 만큼 마셨겠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오늘 이 집 환골탈태시키고 만다. 취기에서 비롯한 알 수 없는 객기가 내 안에서 끓어 넘쳤다. 나는 박지원에게 혹시 모르니 사 오라고 부탁했던 철수세미를 받아 미친 사람처럼 인덕션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김진솔의 원룸 방임주의에 알게 모르게 불만을 품어왔던 박지원도 그에 동참하여 물티슈를 털어 바닥을 닦기 시작했고, 놀러 온 두 사람이 자기 집을 청소하는 광경을 주뼛거리며 지켜보던 김진솔이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에 거품칠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미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지만, 사실 김진솔의 집에 셋이 모이면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마지못해 청소에 동참하던 김진솔이 카페 위에 털썩 주저앉아 "그만하자!" 외치고, 그럼 나와 박지원이 대청소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상 앞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통 상황은 마무리된다. 그날도 나와 박지원은 싱크대에서 시작해 세탁기를 거쳐 신발장에서 끝이 난 대여정을 함께 하고서야 김진솔 앞에 앉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좋다. 이게 얼마만이냐."


예상치 못하게 화장실 청소까지 하게 되어 입이 댓 발 나온 김진솔과 그를 어르고 달래던 내게 박지원이 말했다. 셋이 모이는 날이면 박지원은 항상 만나서 좋다는 말을 했다. 더 어렸을 때는 낯간지럽게 술 마시다 말고 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점점 만나기 힘들어지다 보니 박지원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교복을 입고 있을 때에는 '친구 한 번 만나기 힘들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집에서 엄마 아빠를 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친구는 학교에 가면 당연히 만나게 되는 존재였다. 반이 다르게 배정되어 떨어지게 되어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찾아갈 수 있었고, 학교가 다르다면 주말이나 공휴일에 만나러 가면 그만이었다. 쉽게 말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복을 벗는 것 하나만으로 당연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서울 왕십리, 용인 죽전, 대전 유성 등 새로운 둥지를 틀 게 된 곳이 멀어질수록 만나려면 더 큰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서로가 노력을 쏟아붓는다 해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동아리나 학생회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거나 나처럼 졸업을 일찍 해 취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면서 만남이란 점점 더 성사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열흘에 한 번 만나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이 되고, 한 달이 반년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함께한 역사가 있기에 일 년이 아니라 삼 년 만에 얼굴을 봐도 어색함 같은 것은 서로 북극곰이니 뽀글 머리니 하는 별명 몇 번 부르다 보면 맥주 한두 잔과 함께 날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함께 하지 못한 공백을 안주삼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묘하게 서글픔 같은 것이 몰려와 가슴이 찌르르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려, 너희 만날 수 있을 때 자주 만나라. 그러다 누구 하나 시집가면 진짜 못 만날 거다."


오랜만에 애들을 만났다며 간단히 안부를 전해줄 때마다 엄마는 꼭 이런 말을 툭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저주 내리듯 하느냐'며 톡 쏘아붙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30년 인생 선배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져서 오소소 소름이 다 돋고는 한다.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슬픈 사실이지만 결국 엄마의 말대로 될 것이다.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각자의 세상을 점점 더 넓혀 나갈 것이다. 아무리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하고, 잊히기 전에 안부를 물어도 그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언젠가 희미해지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다. 지난가을에는 혼자 방구석에 앉아 이런 궁상맞은 생각만 하다가 질끔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불속에 파묻혀 베갯잇 적시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진다. 사과를 깎으며 저주를 내리던 인생선배의 말처럼 하나둘씩 시집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진솔과 박지원까지 시집가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하니 질질 짜고 있을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휴대폰 화면은 만남을 주선하는 김진솔과 박지원의 메시지로 시끌벅적하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능한 날과 시간을 열심히 맞춰보는 둘을 보고 있자니 새삼 감동에 젖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너희 세상에는 내가 제대로 존재하는구나…. 얘들아, 사랑한다~!"


두 달만에 만날 생각에 한껏 흥이 올랐던 대화창이 일순 얼어붙고 김진솔과 박지원이 대답했다.


"개소리야. 취했니?"


아무래도 고백을 할 타이밍을 잘못 잡은 모양이다. 김진솔과 박지원은 약속 시간을 정하던 열정을 그대로 가져와 내가 취했냐 안 취했냐를 놓고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싸움의 열기를 보니 술 마신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믿어주지는 않을 것 같다. 후후. 고백 한 번 잘못했다 대낮부터 혀 꼬부라진 술주정꾼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그래도 아직 김진솔과 박지원의 세상에서만큼은 제대로 존재하는 것 같으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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