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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유니콘스와 ‘거룩한 계보’

사라진 왕국의 적통을 찾는 일

by 허리케인봉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바꿔 말하면 야구에서 ‘역사’는 그만큼 중요하다. 뉴욕 양키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최고의 팀인 이유는 역사상 우승을 가장 많이 한 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팬들은 강팀의 역사에 ‘왕조’라는 말을 붙인다. 태정태세문단세, 외우듯 프로야구 팬들은 해태와 현대, 삼성과 SK의 역사를 줄줄 외우는 것이다. 왕조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팀의 계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말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인천 야구의 역사는 각별하고 복잡하다. 유니콘스는 삼미부터 태평양까지 분노와 슬픔의 역사를 거쳐온 인천 야구 팬들의 한을 풀어준, ‘현대 왕조’라고 불린 2000년대 초반 최고의 팀이다.-00시즌 유니콘스는 역사상 최강의 팀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된다- 그러나 인천 팬들의 성원이 정점에 달했을 때, 유니콘스는 인천을 버렸다.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겠다며 난리를 피운 유니콘스는 결국 수원에 머물렀다가, 현대 그룹의 분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7년, 유니콘스는 사라졌고 당시 스무 살이던 나는 왕조의 몰락을 지켜봤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를 지켜보던 전주 팬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아냐, 그분들은 최소한 타이거즈라는 확실한 명분의, 돌아갈 곳이 있었으니 좀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2007년은 열린우리당이 사라지고,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안희정은 대선 이후 스스로를 ‘폐족’으로 칭했다.


2008년, 서울을 연고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했다. 유니콘스 사람들이 모여서 창단한 팀인데, 유니콘스와는 다른 팀이라고 했다. 스물한 살이던 나는 그것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평소 야구 얘기를 많이 하는 아저씨들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내게 답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8년, 노무현은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갔고, 홀가분한 얼굴의 촌부가 되었다. 나는 ’폐족‘이라 칭하는 사람들과, 그의 고향 마을에 찾아오는 시민들 중, 어떤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더 홀가분하게 했을 지 알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 2012년에는 NC 다이노스가 창단했고, 그 해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됐다. 지난 경선에서 서로의 치부를 들추며 지옥불처럼 뜨겁게 싸우던 이명박은 전 대통령이 되어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가끔 아내와 다정하게 브런치를 먹으러 나온다는 목격담이 줄을 이었다.


2013년에는 kt wiz가 창단했다. 유니콘스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수원에 자리를 잡았고, 프로야구는 10구단 체제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가 시작되었고, 통합진보당은 해산됐다. 손석희는 종편 채널로 이직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촛불이 광화문을 수놓았다.


그 뒤로 두 명의 대통령이 더 지나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정치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원래 나는 정치인의 부동산 정책이나 대북관 같은 것보다, 누가 또 재미있는 말실수를 했는지, 누가 또 창의적인 변명을 했는지에 관심이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정치 뉴스에 말실수와 변명만 나오기 때문이다. 가끔 봐야 재미있는 건데.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한 뒤로, 선거에 나오는 정치인은 딱 두 가지 말만 한다. 상대 후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그리고 자기가 어느 계보에 속해 있는지. 조폭이 따로 없다. 어디 식구인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마흔이 다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1982년, 프로야구는 당시 인기 스포츠였던 고교야구의 팬을 모두 흡수하며 개막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연고 스포츠가 되었다.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사람들과 우리 지역 팀을 응원하는 것, 그것이 프로야구의 기본 정신이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야구를 대하는 시각보다, 유럽인들이 축구를 대하는 시각과 비슷하다. 프로야구 원년 슬로건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었다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프로야구의 기본 정신은 ‘우리가 남이가’ 이다.


…라는 것은 이제 정말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야구 보면서까지 머리 아프게 나의 뿌리와 나의 지역을 찾는 일은, 이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이 팀이 좋으니까 이 팀을 응원한다. 10개 구단 중, 5개 팀이 수도권에 위치한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살고 있으며, 지역 고교의 최고 유망주가 지역 연고 팀에 입단하는 시대는 진작에 지났다. 애초에 수도권을 제외하면 지역 인재라고 할만한 인프라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를, 어떠한 계보를 줄창 읊으며 내가 이 계통의 적자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을 보며, 문득 사라진 유니콘스와 몰락한 현대 왕조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후계자를 자칭하지 않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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