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이가 손가락보다 큰 크레용을 든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캐릭터를 떠올리며 하얀 도화지를 채워가는 아이의 손은 부산스럽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선이 놓이고 그 선 위에 또 하나의 선이 덧대지고 비어있던 도화지는 그렇게 조금씩 채워져 간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이 형태로 나타나자 아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좋아하던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을 느끼는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행복을 본다. 행복이 눈앞에 있다. 아이가 전해 준 행복이 비어있던 마음을 채워온다.
밑그림을 그려두고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에게 색을 입혀보라고 한다. 힘들데, 라며 머뭇거리던 아이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만 밑그림에 노란색이 덧대지고 빨간색이 추가되고 파란색도 추가된다. 알록달록해져 가는 그림을 보며 아이가 팔이 저리다고 칭얼거린다. 그러더니 손을 주무르며 말한다. 힘들지만 그림을 위해서 참으며 색칠하고 있다고. 그 말이 왜인지 가슴을 울린다.
에너지란 에너지를 전부 짜내며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아있음에 마주해 왔기 때문일까. 고갈되었다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던 적이 있었다. 괴로움, 고통, 인내, 절망, 희생으로 채워진 시간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지나갔었다. 참는 것이 가시가 되어 속살을 찢고 있음을 알아채면서부터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기 위해 견뎌온 온 날들이 어쩌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시간은 있을지라도 틀린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형태는 있으나 책이 채워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을 지나며 딴에는 진지하게 대면하며 견뎌온 날들과 나를 그 시간에 이르게 한 모든 선택의 순간이 부질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터인가 크레용을 들고 있던 손이 겉돌기 시작했다. 노력의 무용함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를 뺀 모든 사람이 평온하고 순탄해 보였다. 나만 힘이 든 것 같았다. 억울했다. 그래서 더는 아득바득 인생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득할 수 없는 실패와 부당한 상황과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손에 쥘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없는 그 상황. 나의 생은 참고 참다가 생을 마감하도록 운명 지워진 걸까 하는 생각에 그간의 인내가 억울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참으며 하고 있다는 아이의 말이 그동안의 나의 인내가 헛되지 않았음을 가르쳐준다. 그 말이 나 혼자 견디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님을 알려주며 상처투성이가 된 어깨를 감싸 안는다. 내일을 그리며 오늘 하루를 채워나가는 이 순간의 인내가 나와 비슷한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누군가에는 힘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라는 무언의 말을 전해준다. 견딜 수 있을 힘이 남겨져 있을까 하던 내 손 위에 놓인 아이의 손에서 온기가 번진다. 크레용 묻은 아이의 손을 꼭 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