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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Z Jun 09. 2024

생기가 언 가슴에 온기를 남긴다

  봄에 화분을 받았다. 받을 때는 좋았는데 사무실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꽃을 기를 생각을 하니 앞이 까마득했었다. 일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내가 흙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것들을 온전히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우려와 달리 화분 속 생명들은 여름까지 부지런히 꽃을 피워냈다. 그 부지런함이 책으로 둘러싸인 어둠의 굴 같던 사무실에 생기가 돌게 했다. 

  창을 열어두면 꽃잎이 하늘거렸다. 부드러운 움직임이 살아있음의 인사가 되어 상처투성이인 가슴을 매만져주었다.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꽃은 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지고 나면 다음 해 다시 몽우리를 틔우는 것이 꽃의 숙명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까지 뼈가 아릴 정도로 시린 겨울에 안겨 있었기 때문일까. 꽃이 지는 게 서글퍼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그 때문인지 바닥을 채운 마른 꽃잎을 보면 차마 버리지 못하고 화분 위에 올려두고는 했다. 

  느린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어느 월요일, 마르지도 않은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남긴 그림인 듯 바닥을 수놓고 있는 꽃잎을 보는데 우두둑 우두둑하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에서 이별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르지도 않은 꽃잎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수렴한 것이 마음 아파 눈물이 아른거렸다. 눈물을 머금은 채 멍하니 꽃잎을 바라보고 섰는데 아물지 않은 가슴속 상처가 간질거렸다. 생을 다해가던 꽃잎이 남긴 무언의 위로가 덜 아문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게 하고 있었다. 

  꽃잎을 주워 책장에 얹어두고 두 손을 모았다. 찬란한 죽음이다, 아름다운 이별이다, 고마운 매만짐이다,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눈물이 몸으로 번지며 꽃향기를 피워냈다. 온몸에 스미는 눈물을 삼키며 차가웠던 내 봄에 닿은 따뜻한 꽃의 도래를 마주했다. 어차피 지게 될 것이라 해도 가지 끝에서 아슬아슬하게나마 생을 조금 더 이어가 주었으면 했는데 온 힘을 다해 꽃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가지를 보며 그 또한 내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소리 없는 낙화가 가슴에 닿았다. 아직 채 다 녹지 않은 호수 위에 닿은 꽃잎에서 파문이 일었다. 살아있었음의 생기가 언 가슴에 온기를 남기고 갔다. 

Vincent van Gogh_Red Almond Blossom_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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