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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꺼풀 오이씨 Nov 03. 2023

그녀가 보고싶다

버스에서 만난 여인

매번 심각한 이야기만 쓰다보니 나도 좀 쉬어가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 겪었던

지금 생각해도 기분좋은, 아쉬운 일을 적어봅니다.



20대 초반 대학 다닐 때 일입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타고 보니 버스는 한산했고

마침 좋아하는 맨 뒤 창가자리가 비어 있어 거기에 앉았습니다.

맨 뒤 창가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좀 높아서 바깥 경치 보기도 좋고

버스 안을 이리저리 둘러 보기도 편해서 좋아했었습니다. 지금도 좋아합니다.


그 자리에 앉은 후 한 두 세 정거장 쯤에서 버스가 섰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정류장 근처에 있는 친구 집 마당을 처다보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뭐하나? 걔네집은 오늘도 빨래를 밖에 널었나? 개는 뭐하나? 등등

시시껄렁한 관심을 풀기 위해 친구네 집 마당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앞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시선을 돌리자마자 심장이 방광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세상에나......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다니.......

우리 동네인데 내가 왜 그동안 못 봤지.....?

너무 이쁘다.......'


이 정도의 속말을 했었습니다.

저는 시선을 그녀에게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이뻐서 제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 였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라, 어마, 왐마'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앞쪽에 분명히 빈 자리가 있는데

그녀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건 당연하고

너무 당황하고 놀라고 좋아서

숨쉬는 것도 잊을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앉을 빈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천천히 뒤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설마. 설마. 설마!!!!!'


그녀는 거의 제가 앉은 맨 뒤쪽까지 왔습니다.

맨뒤는 다섯 자리인데

제가 오른쪽 창가.

왼쪽 창가는 원래 앉아 계셨던 어느 아주머니.

그리고 가운데 셋은 빈자리.

그리고 제 앞쪽 자리들은 좀 어중띠게 차 있기는 했습니다.


맨 뒤쪽 즈음에서 그녀는

천천히 스캔하듯 자리 하나하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스캔을 마친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오! 주여!!!!'

바로 제 옆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고 너무 놀라고

아이고야 심장이......

(그 때를 생각하는 지금도 심장이 저릿저릿합니다.)


자리에 앉은 그녀를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빙긋이 미소를 띄워 주는 그녀.

미소가 그렇게 고급질수 있다는걸 그 때 알았습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책을 한권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책을 보는건지 궁금해서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흘낏 보았는데

그러다 그만 제 코로 훅! 밀고 들어온 그녀의 향취!!!!

아.... 아직도 기억나는 그 향기.

정말 이것은 천상의 향기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찔한 그 향기. 아카시향기 천배정도의 향기.


이래저래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저에게

더 정신못차릴 일이 벌어졌습니다.


책을 읽고 있던 그녀는 따사로운 햇빛에 노곤해 졌는지

살짝살짝 헤드뱅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다가 살짝 툭툭 머리를 떨구는 정도이다가

나중에는 버스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저러다 허리 나가지 싶은데...'정도 까지 되었습니다.


어느정도 갔을까.....

버스가 급하게 좌회전을 했습니다.

버스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그녀도 역시 같이 움직였습니다.

좌회전을 마쳤을 때.

그녀의 머리는 제 왼쪽 어깨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신이시여. 이것은 정녕 행운입니까? 시련입니까?'


깃털만큼 가벼운 그녀의 머리가 제 어깨위에 있다니!!!!!!!

저는 온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여 그녀가 불편할까봐, 깰까봐. 미세하게 움직이며 최적의 편안함을 제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은 익숙함의 동물이 맞는건지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 (안 믿으셔도 저는 몰라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제 왼 뺨에 닿은 순간 놀라서 다시 고개를 바짝 세웠습니다.

그 순간 다시한번 그녀의 향취가 제 코를 강타했고

저는 거의 기절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응........??????'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습니다.

아니

그녀의 향취에 마취되었다는게 맞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자세는

그녀는 제 어깨에 기댔고

저는 그녀 머리에 기댔고.

뭐 이런 미친 시츄에이션이.

처음보는 사이인데.

다행이도 그녀는 제가 머리를 들었을 때 깨지 않았습니다.


너무 창피하고 미안하고 등등의 감정으로 창피해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리에서 반짝 반짝 빛이 났습니다.

'와.....이쁘면 이렇게까지 환영이 보이나?'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그 빛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다시한번 바라 보았습니다. 몰래 살포시. 그녀가 깰까봐.

그 빛은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에 빛이 반사되어 나는 실제 빛이었습니다.


오! 천하제일 미녀는 자체 발광을 하는구나.

싶어 좀 더 자세히 본 저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빛은, 그 빛의 실체는.

제 침.에 반사된 빛이었습니다.


아 ㅠ.ㅠ 미런 미친.

저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천사같은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의 뛰다시피 해서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마침 내리는 문이 열리는 찰라여서 저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서 2정거장 쯤 전이었습니다.

학교는 늦었고, 나는 말할수 없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고

'아.....오늘은 망했다'

하며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쉬운 마음에 제 왼쪽 어깨에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으로 위로하고 싶어

제 오른손을 제 왼쪽 어깨에 얹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

그녀는 차가운 사람. 이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하....그 여자도 사람이구나. 침 흘렸네.'

그녀가 사람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침 내음을 한 번 맡고

그 옷을 그날 빨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어지간한 미녀에게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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