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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job 조은 Sep 26. 2024

빼곡히 들어선 의미라 했지만 나에겐 공허하기만 한

<한계> 가사 탐미

난 여전히 그대론데 넌 달라져 버렸어
근데 혹시 한 번쯤 반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나요

난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손짓에 또 몇 개의 표정과 흐르는 마음에 울고 웃는 그런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대체 내게서 뭐를 더 바라나요
내가 줄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줄 수 없음에 미안해해야 하는 건 이제 그만둘래요

_ 백예린 <한계> 가사 중



글쎄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인가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유행을 했다. 말 그대로 유행이었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높다-낮다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기준에 휘둘리기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자존감이라는 말이 한참 좋았다가 또 한동안 싫었었다. 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 것 같아서 이런 말이 세상에 생겨 나를 설명할 말이 생겨서 좋았고, 근데 또 어느 날 보니 내가 그리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서 이 말을 쓰지 않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이 말은 그렇게 상관 없다는 걸 알았다. 심리학을 공부해보니 자존감이라는 건 일시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고, 상태를 평가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를 신경 쓰기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알아봐줄 수 있는지를 신경 쓰는 게 옳은 방향이라는 걸 알았다. 그냥 자존감이 높은 상태인지 낮은 상태인지 그런 거 말이다.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행복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인생의 중요한 목적인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행복은 내가 삶을 좋은 에너지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굳이 옆에 두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삶을 잘 살아가다 옆을 보면 이미 내 곁에 있는 그런 게 행복이다. 때로는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 지치지 않게 행복을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알고 보면 늘 곁에 있지만 이런 건 행복이 아니라고 몰라주면 늘 없는 것 같이만 느껴진다. 알려고 하면 매일 알고 모르려면 평생을 모르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럼 모를 때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가야 한단 말인가. 정말 어렵다. 그럴 때의 나는 쉬운 질문을 했다. '나 오늘은 언제 행복했지?'


어느 날 적은 일기를 보면 이렇다.


1. 친구 만나는 거 행복

군산 여행을 왔는데, 여행 동안에 군산에 친구가 많이 생겼다. 에스프레소 바 사장님은 작년에 봤을 때 예뻐서 기억한다고 해주셨다. 가보자 사장님은 배고플 때 오면 그냥 밥 한상 내어주시겠다고 꼭 다시 오란다. 또 어제 옷집 사장님은 군산 올 때마다 커피 먹고 싶으면 언제든 놀러오란다. 친구 별거 없다. 기억할 한 지점만 있다면 친구다. 어떤 방식으로던 다시 만나면 알아보고,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 친구다.


2. 결과보고서 쓰고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하는 거 행복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 하다보면 단순 업데이트가 아니라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진짜 행복하다.


3. 창가나 바 자리 앞에서 글쓰는 거 행복

한 장으로 정리한다.


4. 저녁 산책 하는 거 행복

오늘은 생각을 정리할 겸 산책을 하다가 그냥 Square 라는 노래 듣다가 ‘Square 과 Frame 의 차이처럼 대하자’ 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모양이구나, 여기가 각졌구나 그래서 이 사람의 말은 이건 네모라고 말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될 문제지, 그게 내가 이걸 바라보는 전체의 시각만 안되면 된다 싶었다. 왜 이런 비유로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네가 필요로 하는 나의 모습이 같지가 않다는 것




사회생활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물론 제일 많이 듣진 않았겠다. 그냥 내가 기억하기에 많이 들었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잘 포장된 사람같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때 충격 받기도 했고, 듣고 이르게 상처 받았기에 기억나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 상처 받았을 수도 있는데, 길게 생각해보니 그게 내 진심이라 상처 받은 것 같다. 기껏 진심이라고 내밀었는데 포장이라는 말 하나로 쉽게 부정당한 것 같을 때. 굳이 치자면 '아닌데.. 그거 제 진심인데요.' 보다는 '맞아요~ 포장이에요~'라고 퉁치는 게 덜 상처 받는 길이라서 그렇게 새침하게 굴기도 했다.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맞는 말이 아니라 억울하긴 했다. 히지만 인정하는 이에게 억울함은 미덕이 아닌 법.


근데 어느 순간부터 ‘포장이 어때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걸 포장이라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선물 같다고도 하더라. 그러고 보니까 포장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내가 그걸 해내서 준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누군가에게 전하고도 들려 보내지 못한 진심의 순간들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포장을 위해 하는 과정들을 생각해본다. 그 안에 있는 걸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해서 가장 예쁜 포장지를 골라 여러 기술을 써서 포장한다. 거기다 포장에 들인 노력과 맥락을 아는 사람은 포장되어서 본인에게 도착한 걸 선물이라고 하지 않나?


나에겐 그런 방식이 자연스럽진 않아도 진심이었다. 언젠가는 포장지를 했다 풀었다 부담스러워할까 결국 둘러서 건네주는 내가 답답했는데, 나는 그게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런 마음들을 그냥 선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포장하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였는지,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지 내가 선물씩이나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언젠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백예린의 <한계>가 수록된 커버 앨범 [선물]의 앨범소개글 역시 이런 마음들을 잘 담고 있다. 내 마음을 언어로 풀어준 것 같은 글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게 아니라 손끝이 저릿하다.

백예린은 사랑을 담아 준다는데 나는 내 포장지 속에 어떤 마음을 담아 줘야 할까.


선물은 보통 포장지로 감싸거나 그럴듯한 종이백 안에 넣어 주곤 한다. 앨범의 제목 '선물'이라는 단어에 담은 것은 온전히 나의 개인적인 감정일 뿐, 결국 선물을 받는 사람이 포장을 한 겹 한 겹 뜯고 느낄 감정이 무엇일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곡들을 다시 부르며 내가 느낀 것들을 담아 포장을 열심히 해보았는데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모두 건강하게 다시 만나길 바라요.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사랑을 담아, 예린

_백예린, [선물] 앨범소개글




<한계>로 시작했지만, 나는 이 앨범에 있는 모든 노래가 좋다. 모든 노래가 다 좋은 앨범을 만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조금 이전엔 <antifreeze>가 좋았는데 이번 봄에는 <그럴때마다>가 유독 좋았다. 그래서 이 앨범을 전체적으로 들어보게 되었다가, 앨범 소개글을 읽어봤다가 좋아하는 앨범이 되었다. 노래를 개별로 들을 때는 어떤 감상에 지나지 않는데, 노래 하나를 타고 앨범 전체를 알게 되면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만나는 세계는 모두 좋았다. 진심이든 앨범이든 뜯어볼수록 괜찮은 걸 만나는 게 행운이고 인연인 것 같다. 어쩌면 뜯어보겠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인연의 시작인 것도 같다. 이 앨범을 좋아하게 된 게 이제껏 내가 파편적으로 좋아하던 것을 제대로 좋아할 수 있게 된, 어쩐지 불편하던 내 하나의 특성을 긍정하게 된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거야


 이제는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렇게 생각을 한다. 나는 이걸 좋아하기 위해 오래 기다려 왔다고 말이다. 돌아보면 무언가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도 내 안에는 차곡차곡 무언가가 쌓였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고, 밤새 내린 눈이 그치고 나면 하루 아침에 눈이 녹기도 하듯 그게 또 하루 아침에 없어져 공허하고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근데 알게 됐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또 눈은 오고, 내가 아는 그것을 또 마주치면 이전보다 더 빠르고 깊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말이다. 생각해보면 하루 아침에 생긴 무언가를 잡지 못해서 후회한 일보다 기다리지 못해 후회한 일이 더 많았다. <한계>에는 '방랑과 방황의 차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나도 오래 생각해 봤는데 방랑과 방황의 차이는 무언가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그 무언가가 뭐냐고 물으면 '무엇이든'이다.


성인이 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는 참 긍정적인 사람인 것 같아”인 것 같다 그러려고 노력했으니 그렇게 보였을 거다. 근데 나는 이제서야 내가 진짜 긍정적인 사람 같다. 긍정이라는 게 무조건 상황을 좋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할 수 있어야 진짜인 것 같다.

절망, 후회, 슬픔 이런 걸 “아니야 슬프지 않아” “아니야 후회하지마” “별거 아니야 절망할 필요 없어”라며 억지 희망, 억지 웃음 만드는 것보다 절망, 후회, 슬픔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다.


없는 게 아니라 있는거야. 나한테 있는거야. 내가 가진 게 많구나

이 절망도 내 것이지만 이 절망 내가 희망으로 바꿀 수 있어, 이 후회는 내 것이지만 나에게 소중한 걸 몰라서 후회하는구나 꼭 알아봐야지, 이 슬픔 내 것이지만 눈물 한 번 시원하게 질질 짜면 내가 끝낼 수 있어

한계라는 걸 한때는 부정적으로만 보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 한계는 그냥 '선 긋는 거'인 것 같다. 그 선을 잘 그어야 나는 이런 모양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양이 있어야 채워서 줄 수가 있다는 거, 내가 가장 최근까지 알게된 건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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