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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름 Jan 05. 2021

환상에 비추어 본 현실 : <보건교사 안은영>




1.

현실이 녹록지 않을 때 사람들은 환상에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 싸우고 경쟁하는 티비 프로그램은 줄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내용이 늘어난 것도 잔인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0년에 처음 발표되고 2015년에 출간되어 어느 때보다 현실이 잔인했던 2020년에 넷플릭스 드라마로 다시 태어난 『보건교사 안은영』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환상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기대고 싶은 마음과, 안락하지만은 않은 환상이 제공하는 대리만족도 있었을 것이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환상을 비틀어 현실을 꼬집는다.




정세랑이 만들어 내는 환상은 현실적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들어낸 기운의 응집체인 젤리를 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해가 될 때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에 기운을 불어넣고 젤리를 해치우며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한다. 그 젤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의 폭력, 경쟁, 반목, 불명예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이 젤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3단 장난감 칼로 없애 세상을 지키는 퇴마사이자 치유자, 영웅적 캐릭터 설정이 환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오간다. 슈퍼맨처럼 세상을 구할 외계인도 아니고 아이언맨처럼 돈이 많거나 남자도 아닌 우리네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영웅이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이 택한 환상은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길 원하는 것인지 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이 시대에 남긴 것은 크게 여성 영웅의 등장,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단상이라고 볼 수 있다.






2.

안은영은 보건교사다. 맡은 역할을 싫어하면서도 그것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해내는 보건교사며, 의료용 더미를 중고로 사다가 일일이 들고 교실을 돌면서 응급처치 교육을 한다. 누군가는 이 교육을 기억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능력을 암시장에 팔아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는데 그쪽은 쳐다보지 않고 세상을,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구한다. 그리고 그는 여성이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그런지, 퇴마사나 초인은 오랫동안 남성의 영역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영웅이라고 볼 수 있는 박씨부인전 이후로도 설화나 소설에서 여성 영웅이 등장하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던 이들은 많지 않다. 여성 영웅의 등장이 낯설지만 반갑다. 세상이 바뀌기에 문학도 변화한다.




안은영은 이 시대 여성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굴러들어간 자리에서 대단히 성실하게 자기 몫을 해내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모습이 현대인과 닮았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회사에 출근하는 일반 대중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여성 영웅의 등장에 사람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꾸준하게 인기를 얻고 있다. 여성 작가들의 강세도 이어진다. 정세랑을 포함하여 김초엽, 장류진 그 외에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이 누가 하는 어떤 이야기에 돈을 쓰고 싶어 하는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 보여준다. 지금 시대의 독자들은 의도적으로 여성 작가와 여성 서사를 선택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 일 수도 있다. 지금껏 남성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여성의 이야기는 들을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이며 그것을 충족하는 이야기들이 선택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만들어 내는 환상은 현실에 기반하는데, 안은영이 보는 젤리-일종의 귀신- 중에서도 여성들이 등장한다. 포주가 창문과 문을 밖에서 잠궈버려서 불이 났는데도 탈출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한 열여섯 명의 여성들, 폭력적인 죽음으로 인해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방석 귀신,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숨어버린 고등학생이 하는 짝사랑의 그림자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여성의 얼굴을 한 채로 독자를 찾아온다. 젤리는 환상이지만 성매매 숙소에서 죽은 여성들은 환상이 아니다. 뉴스 검색 몇 번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망가지는 아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입시제도가 만들어낸 미신도 마찬가지다. 수능을 앞두고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것이 수능을 앞두고 온갖 토테미즘을 동원하여 신을 불러내 소원을 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온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국이기에, 수능을 앞두고 여고 방석을 훔쳐 그 위에 앉아서 시험을 보면 대학에 잘 간다는 시대착오적인 미신 또한 숨을 부지할 수 있다. 현실의 어두운 면이 젤리가 되어 나타나면 안은영은 무지개색 칼로 젤리를 처치할 때 독자는 일상의 부조리 반목 폭력과 같은 것들을 깨부수는 듯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매력적인 인물을 필두로 한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 없다.




안은영은 여성임에 동시에 영웅이라는 점이 특별함을 더한다. 영웅이란 일반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개인의 이익이나 행복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수행하고, 그 결과 집단의 추앙을 받게 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여 개인적 가치보다도 집단적 가치를 우선하여 실현하고 성공한 인물이 영웅이다. 비록 안은영만이 젤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다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하지만, 그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이다. 영웅이란 난세에 등장하여 본인의 희생으로 다수의 행복을 위해 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등장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타인을 위해서 살기 않는다. 코로나 19로 특수한 상황을 맞이한 2020에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영웅적인 면모가 주목을 받았지만, 영웅이라는 이름하에 일반인들이 버틸 수 있는 무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안은영도 마찬가지다. 젤리에 데어 상처가 나고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주변인에게 위험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M고를 그만둘 것을 권유받지만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지 못했다. 사람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소명을 믿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정상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에게 사람들은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원하는 것은 아무 일 없이 학생들이 졸업해 없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너스를 받거나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일반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가 다수의 행복인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또 우리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환상이 사람들이 이러한 인물을 욕망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웅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한문 선생 홍인표도 마찬가지다. 홍인표는 사립 고등학교 창립자의 손주지만, 손주라는 것을 티 내거나 으스대지 않고 예의와 정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그에게 기운을 충전받은 안은영이 학교를 구하는 것을 도와주는 조력자 또한 사람들이 욕망하는 인간성에 기반으로 만들어진 환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젤리들만 환상인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 또한 사람들이 원하는 환상 같은 인간상이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혐오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인간성의 말로를 보는 것 같은 사건들은 매일 일어난다. 그 와중에서도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공평과 친절함보다 반칙을 하는 것이 빠른 성취와 이어지는 사회에서 안은영 그리고 그의 조력자 홍인표는 그 가치를 알고 지키려고 했기에 그들은 귀인이다.





3.

정세랑이 그리는 세계에서 소수자와 약자는 일반 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동성애자, 입양아,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을 보다 보면 그가 환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을 똑같이 대하라는 것, 그들은 모두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고, 그게 안은영을 선택한 독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동성애자로 대표되는 성적 정체성이 절대다수와 다른 소수자들이 대한민국 사회를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직도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성적 지향성이 소수에 속한다고 밝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무마하기 위해 웃으면서 넘어가는 분위기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늘 있었던 동성애가 ‘교정’ 대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동아시아 고전문학에도 복숭아를 깨무는 소년에 대한 사랑은 자주 등장한다. 자연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닌가. 늘 있었던 것,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정상성을 향해 달려가는 영웅인 안은영의 세계에서는 동성애 커플을 구타하는 일이 없애야 할 대상인 젤리의 영향을 받아 그들이 잠깐 이상해졌기 때문이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장애에 대한 차별도 마찬가지다. 다리를 저는 홍인표 선생이 별문제 없이 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장애를 놀리는 학생을 마주한 것도,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를 맡기 싫어하는 선생님들도 모두 누군가 악의를 지니고 학교에 용을 심어놨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처럼 환상을 비틀어 현실을 꼬집으며 사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상’은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약자에 대해 세심한 태도가 곳곳에 보인다.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은영을 차별하지 않는 남성 홍인표라든지, 동성 커플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들이 학생 사회에 편입되도록 두는 것, 입양아인 아이를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 것처럼 약자를 일반 사람들처럼 대하면서 이것이 추구해야 할 정상성이며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한다.




올해 7년 만에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다.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인데, 성적 지향, 고용형태, 성별, 출신 국가,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권위가 작성한 시안엔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과 같은 차별 사유가 적시되어 있으며 차별의 개념에는 직접 차별, 간접 차별, 괴롭힘, 성희롱 등이 포함된다. 이 법안을 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코로나 19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 차별금지법이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논의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편견을 걷어 내고 법안 취지를 바라봐 달라. 단 한 사람의 시민이라도 차별받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차별받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인권위가 4월에 실시한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성인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종교단체 등이 주로 공격해온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73.6%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미첼바칠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지난달 30일 유엔 제네바 사무소에서 열린 제44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에 대한 고려와 빠른 입법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OECD 회원국 가운데 한 대부분의 국가에 이미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이 존재한다. 한국의 인권 감수성이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올 초에 이태원 발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클럽을 굳이 게이클럽으로 표기하여 사회 전체에 혐오 분위기가 퍼졌던 것처럼 아직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은 사회에 만연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11월에는 롯데마트에서 시각장애인 안내견 출입을 거부했다가 논란이 되자 뒤늦게 사과한 것처럼 낯설고, 다수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너무나도 낮은 사회다. 이런 사회에 안은영의 세계는 누군가에게는 먼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안은영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젤리라는 환상으로 풀어낸다.





비정상과 없어져야 하는 대상인 젤리에 의해 잠식된 이들이 저지르는 것이 혐오에 기반한 폭력이니, 모두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안은영과 조력자가 젤리를 무찌르면 사람들은 혐오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를 작가도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도 바랄 것이다. 그게 보건교사 안은영이 남긴 발자국이기도 하다. 발을 저는 한문 교사와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나 반에서 기피 대상이었던 안은영이 세상을 구원하는 환상 속에서 입양된 래디는 당당하게 음악을 하며 새엄마를 세상 밖으로 꺼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가정의 형태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가기 어려운 난데없는 옴잡이를 위해서는 대학 장학제도를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정상성의 재조립이다. 그들을 정상이 아니라고 규정짓는 대신에 그들을 정상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 점이 요즘 시대의 독자들이 원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여태 닳고 닳도록 다뤄진 이야기 말고 인간의 설정값을 여성으로 두고 하는, 성이 같지 않은 사랑의 형태가 포함된, 나이가 많거나 다양한 이야기를 원한다. 앞으로 젊은 세대가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을 본다면 차별금지법 제정 정도는 당연한 사회를 원하는 듯싶다.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도 비교적 젊은 세대로부터 튀어나오고 있으며 세대를 타고 내려갈수록 자신의 생각을 더 분명히 말하고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세대니, 그들이 생각하기에 옳은 쪽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려 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오랫동안 안은영이 사랑받은 데는 그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90년대생이 온다』를 읽고 그들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소비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세대 갈등을 줄이고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4.

만 18세에게 투표권이 생겼다. 국정화 역사 교과서는 폐지됐다. 고등학교가 배경인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는 교육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어느 교과서는 친일의 성향이 강하고 독재 정권을 미화하며 현대 사회가 가고자 하는 흐름에 역행하는 교과서들이 파다했다. 그런 교과서 중에서 어떤 교과서를 선정하여 배우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옴니버스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사립 고등학교인 M고의 교장 선생님이 친일과 독재 정권을 옹호하며 내용도 부실한 교과서를 선택하라고 역사 교사를 괴롭히는데, 꿈속에서 과거에 죽은 사람들이 나와 안은영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교장실로 인도하는 꿈을 꾸고, 교장 선생님이 그 이후에 병가를 낸 틈을 타 교과서는 수월하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과서가 채택된다. ‘온건한’ 역사 교사였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덜 온건해진다. 나쁜 사람들이 선거에 뽑히는 이유, 역사는 역류 없이 흐를 수 없는지 학생들이 질문하면 최대한 민감한 쪽으로 설명하려고 애쓰며 다음 선거에는 투표권을 가지게 될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18대 대통령 탄핵 시위에는 다수의 고등학생이 참여했다. Z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옳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이게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신입생 장기 자랑과 같은 오래된 풍습은 대학가에 사라지고 있으며, 신입사원이 입사한 뒤에 불만을 똑똑히 말했다고 당황하는 선배들의 사연이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온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의 영향인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표현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교육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그들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지에도 달려있다. 어떻게든 앞의 세대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안은영은 미래 세대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대체로 영민하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문제 해결력 또한 뛰어나다. 고등학생답게 사랑에 아파하기도 사고를 치기도 한다. 장난이라고 허용할 수 없는 부분 또한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미성숙할지라도 뚜렷한 자아를 지닌 존재들이라는 말이다. 얼굴과 이름이 보이기 전에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하나의 입시제도에 갇혀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입시제도부터 다 뜯어고친다면 급진 개혁의 끝이 되겠지만, 왜 10대 자살률이 높은 지는 우리 모두가 멈춰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입시제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민음사 <한편> 인플루언서 호에 기후 문제에 대해 기고한 이는 청소년기후활동가였으며,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을 때 목소리를 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도 스웨덴의 10대 그레타 툰베리였다. 그레타 툰베리는 2018년 12월에는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제24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4)에서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을 겨냥한 연설도 했는데,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라는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고 2019년 타임지와 세계적 권위의 과학 저널인 네이처에서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을 계기로 세계 곳곳에서 젊은 환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이 있을지는 환경부에서도 플라스틱과 비닐에 대한 정책을 점점 더 강하게 펼치고 있다. 플라스틱 빨대는 2022년까지 상업 목적으로 제공되는 1회용 비닐봉투 사용은 2030년까지 금지시키는 것이 환경부의 1회 용품 줄이기 로드맵이다. 2015년에도 만약 지금과 같은 기후변화, 일회용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면 안은영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실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래세대는 우리보다 반드시 뛰어날 것이고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 세상은 비단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곧 어른이 되며, 아직 어른이라고 볼 수 없는 나이 대의 18세들도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투표권이 생겼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고등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일상을 지켜낸 것처럼 미래세대가 사회를 휩쓸어 바꿀 날도 머지않았다. 이미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90년대생으로 구성된 문명특급 팀과 재재가 뉴미디어 시장을 쓸어 판도를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변화는 계속 찾아오고 있으며,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5.

여성 작가 정세랑이 만들어낸 안은영이라는 캐릭터에 여성 감독 이경미가 숨을 불어넣어 여성 배우 정유미가 그를 연기한 넷플릭스 드라마가 공개됐다. 이 작품을 인간의 설정값을 여자로 두고 작품을 만든다는 이경미 감독이 맡아 영상화한 것 또한 의미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다수의 작품 중에서 굳이 왜 이 작품이 넷플릭스에 판권이 팔렸는지, 넷플릭스 드라마로 재탄생한 이 작품을 사람들이 왜 많이 봤냐 하먼 이 작품이 어떤 말을 남겼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정세랑은 드라마 각본에도 참여했을 만큼 원작이 잘 재현된 드라마며, 작중에서와 성별이 다른 인물이 등장하면서 다채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환상을 말하지만 환상은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 안은영이 해치우는 에로에로 젤리를 우리가 볼 수 없지만 현실 속의 모순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정세랑은 따뜻한 목소리로 삶에 위로를 건넨다. 기운을 받아야 능력을 수월하게 쓸 수 있는 안은영이 소원이 잔뜩 모여있는 절과 탑을 돌면서 소원을 먹고 살아가는 장면은 영웅조차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삶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이 공감을 자아낸다.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친절함은 악함을 이길 수 없다고 읊조리는 장면은 현실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절대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의 영웅은 더 현실과 가까워진다. 악이라고 불릴만한 이들의 행동 동기도 먹고살기 위함에 가깝다. 선이라고 불릴만한 이들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숨을 옥죄어 오는 동안 사람들이 택한 상상은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지니며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길 원했을까. 시대가 선택하는 문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절대적 선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 무시당하지 않는 친절과 선의, 학생들의 고민과 문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선생님 같은 것들이라고 짐작해본다. 여성 영웅 서사, 소수자를 남들과 똑같이 대하는 사회,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은 안은영을 마주한 독자들이 원했던 것이며 안은영의 이야기가 세상에 남긴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세상이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바뀌는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것이냐, 앞으로 만 18세 투표권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냐, 여성들의 이야기가 얼마만큼 들릴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만들 것이냐는 모두 우리에게 달려있다. 어떤 이야기를 소비하고 그것에 대해 진득한 대화를 만들어낼지는 독자인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부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도래하길, 안은영의 이야기를 선택한 이들의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과 유사하게 세상이 바뀌어가길 바라본다.





올해는 환상보다도 더 환상 같은 현실이 가득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주식 서적이 인기를 끌고 한국 문학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해였다. 일상 속의 영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의료진에게는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안은영이 일상 속 영웅이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일상 속의 영웅이 되었다. 안은영이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하는 것처럼 의료진을 포함한 역학 조사자, 방역담당자와 같은 종사자와 공무원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구하고 있다. 안은영이 언젠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들도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수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일상 속 거리두기를 하는 일반 시민들이 답답해하며 이전의 일상을 간절하게 원하며 다 그만두고 싶을 만한 순간이 자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이 무너지면 영웅들은 그와 같이 무너질 것이다. 안은영은 무지개색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쓸 수 있다. 이처럼 시간과 개수가 정해져 있는 능력은 비단 안은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일상 속 영웅들에게도 아마 한계가 닥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 순간 오기 전에 이 길고 긴 싸움이 끝나길 빌지만,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최대한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다. 보호막을 지닌 홍인표 선생이 안은영을 충전시켜주면 본래 가진 것 이상의 능력을 쓸 수 있었던 안은영처럼 거리 두기로 최대한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다. 벌써 일 년이 지나가고 끝은 아직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없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마음을 간직한 채 주변의 안은영에게 힘을 불어넣는다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버틸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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