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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May 06. 2021

단편 영화 <거미>

사회적 문제와 개인의 욕망을 관통하는 감각적이고 대담한 시선

<거미>

2019, 구소정 감독



*현재 이 영화는 다음 링크를 통해 구매한 뒤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s://purplay.co.kr/off/movie_introduction.php?fvCode=purplayindie&mvId=92





혜원(임선우)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더구나 임신한 상태이며, 이사를 위해 내놓은 집이 하루 빨리 팔리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운 시누이인 유라(이다영)의 집을 방문하는 게 그녀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다. 그리고 유라는 갑작스럽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해외로 가족 여행을 간다며 혜원에게 키우고 있는 거미를 맡긴다.


일단 <거미>는 인물이 외적인 갈등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혜원이 유라의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며 마주하는 크고 작은 갈등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인물을 단순히 피해자로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도, ‘결혼을 앞둔 여성이 겪는 갈등’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춰진다. 결국 그런 외부적 갈등에 있어서 혜원이라는 인물이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가 분명 중요할 것이고, 기시감에 대한 우려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거미를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특정 장면을 마주한 뒤 버티지 못하고 구토하는 혜원의 모습을 담은 <거미>의 첫 장면은, 이 독특한 연출을 가진 작품의 핵심이 되는 장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출처 - Indieground

갈등과 욕망     


언급한 것처럼 혜원의 주변에는 불가피한 갈등들이 만연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그 반응이 오로지 갈등에 대한 감정적 반응, 즉 인내(忍耐)와 같은 방식을 통해 예측 가능한 연민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인물이 가진 주체성을 이끌어낸 뒤 어떤 욕망이 발현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일단 가장 단순하면서도 장르적으로 드러나는 혜원의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시매부(媤妹夫)로 보이는 ‘유라의 남편’(송철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일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준형(강길우)이 침대 위에서 그녀의 하체 쪽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을 때 그녀의 시선 속에서 준형은 유라의 남편으로 바뀌어 있다. 즉 그녀의 감정이 준형이 아닌 유라 남편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온 갈등뿐 아니라 내적으로 점화된 욕망이 불가피한 또 하나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순간 직전에 먼저 욕구를 드러낸 것이 (‘해 줘’라고 말하는) 혜원이라는 사실 역시 도덕적이지 못한 욕구의 해소를 원하는 그녀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유라의 집을 나오면서 유라의 남편과 마주한 그녀의 모습이나, 핸드폰의 사진을 보며 홀로 욕구를 해소하는 그녀의 모습 역시 그 연장선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Indieground

결국 이 이야기는 외적 갈등 속에서 특정 욕망을 가진 여자가 겪는 내적 갈등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편으로 그 설정이 다소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다.(혜원이 유라의 남편에게 감정을 갖고 있음이 그저 갈등을 위한 독립적인 설정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급한 유라 남편에 대한 욕망이 후반에 준형이나 유라와의 관계적 갈등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오로지 그녀의 불안정한 상태가 그 중심에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 혜원의 욕망을 ‘어긋난 애착’과 같은 하나의 감정적 원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어 보이는데, 흥미롭게도 이는 관점에 따라 오히려 <거미>가 가진 깊이를 대변하는 순간들로 다가올 수 있다.     

거미의 존재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미’의 존재는 혜원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보이지 않지만 집 안 어딘가에 있을 존재라는 점에서 극의 긴장감을 제공할 뿐 아니라, 거미는 혜원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다.(물론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유라의 집에서 돌아온 혜원은 거미에게 먹이를 주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다가, 그녀가 준형과 통화를 하는 도중 잠깐 움직인다. 그리고 다음 날 거미는 사라진다. 움직이지 않는 거미는 그간 욕망을 억눌러 온 그녀의 상태로 보이며,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거미는 준형과의 전화에서 드러나는 갈등을 마주하고 그것의 해소와 욕구의 충족을 원하는 그녀의 무의식을 대변한다. 그리고 거미는 사라진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닌, 억눌러 온 그것이 상자를 빠져나온 거미처럼 비가시적으로 발현된 것이리라. 하지만 집안 어디에 있을 거미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아직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출처 - Indieground

이는 마치 거미가 먹이를 보듯, 상자에서 빠져나온 애벌레를 보는 그녀의 모습과, 집을 보러 온 ‘인부’(김철윤)의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상자에 있던 거미가 타란튤라라는 것을 알고는 혜원에게 말한다. “임산부가 비위가 좋으시네.” 그리고 남자는 그의 아내(한주미)에게 애벌레가 든 상자를 장난스럽게 가까이 가져간다. 이때 두 사람의 모습은 눈치 없는 제삼자의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임신한 여자의 반응이 같은 임산부인 혜원의 모습과 비교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작품의 의도로도 느껴진다. 다시 말해 혜원은 그간 자신이 거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것이 흔한 행위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 욕망에 빠져 거미도 애벌레도 어떠한 감흥 없이 보는, 일종의 ‘중독 상태’에 놓인 그녀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준형의 말처럼 창문을 통해 사라진 줄 알았던 거미를 혜원은 천장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준형의 입술을 깨물어버린다. 분명 준형은 이전에 침대에서 혜원이 말한 것과 같이 그녀에게 ‘해 줘’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중에 거미를 발견한 그녀는 자신의 주체적인 욕망을 깨닫고 수동적인 어떤 것도 거부하는 상태에 놓인다. 그렇게 준형은 피를 닦으며 집을 나서고, 혜원은 오롯이 거미라는 욕망의 존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주체적 욕망


언급한 것처럼 혜원의 욕망은 처음부터 그녀 스스로 온전히 통제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 욕망의 존재를 마주하고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유라 남편에 대한 감정적인 욕망이 단순한 호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지도 모르며, 길을 걷다 육교 위에 있는 그를 발견한 뒤 뒤따라 가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출처 - Indieground

거미가 사라진 사실을 안 뒤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그 부분이다. 혜원은 한 여자와 걷고 있는 유라 남편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미 사라진 거미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혜원은 유라 남편을 목격한다. 그리고 해당 장면 직후 방에 홀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즉 유라 남편을 뒤따라 가는 장면은 혜원의 꿈속일지도 모른다. 꿈과 욕망에 있어서 불가피한 해석의 방식은 분명 ‘프로이트’적 해석일 텐데, 그렇다면 유라 남편이 나오는 꿈을 꾼 그녀의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라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을 본 뒤 혜원은 그와 직접 마주치지 않고 오히려 놓치고 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약 그에게 느끼는 그녀의 감정이 순수하게 호감이라면, 다리 위에 그와 함께 있던 여자는 혜원 자신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뒷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은 그와의 발전된 관계를 원하는 것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 관계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르는 여자와 걷는 그를 따라가서 잡으려는 행동은, 그의 아내인 유라가 취해야 할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혜원이 아예 유라처럼 그의 아내가 되고 싶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동시에 그녀의 욕망은 유라의 남편이 외도하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혜원은 그가 혜원 자신이나 혹은 그 누구와라도 외도하는 상황을 원하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유라 남편의 관계가 발전하는 게 아닌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에 빠진 그녀는 꿈에서 깬 뒤 애벌레를 짓이기기 시작한다. 이 역시 진짜인지 상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욕망이 시각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 홀로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사진에는 유라의 남편이 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그 사진이 유라 남편의 독사진이 아닌, 유라와 그들의 아들까지 있는 ‘가족사진’이라는 점이다.

출처 - Indieground

언급한 것처럼 혜원의 욕망 중 하나는 유라 남편 자체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욕망의 일부로도 느껴진다. 즉, 그녀가 침대 위에서 욕구 해소를 위해 시각적인 자극으로 설정한 것이 유라 남편이 아닌 그 ‘가족 자체’일지도 모르며, 만약 그렇다면 꿈이 담고 있는 그녀의 목적은 유라의 가족이 구성원 중 누군가의 외도로 인해 파국을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보다 좀 더 여유로운 상황에 놓인 그들을 향한 혜원의 질투가 원인이리라.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주변 갈등으로부터의 도피와 안정감이다. 그것은 유라의 가정과 비교해서 경제적 안정감일 수도 있고, 준형이 좀 더 빨리 귀가하길 바라거나 곧 결혼하는 두 사람만의 집에서 오는 관계적이거나 정서적인 안정감일 수도 있다.(유라의 가족은 그것을 전부 갖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요소들의 불안 때문에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게다가 임신을 한 그녀가 집을 보러온 두 사람에게 느낀 감정 중 하나 역시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그러한 외적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녀가 작동시킨 방어기제가 바로 ‘주체적인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 억눌러 온 욕망은 발현되자마자 찾을 수 없는 거미처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며, 수동적인 반응을 거부하고 욕망을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이와 함께 그녀가 처음에 영화를 보다 구토를 하는 것은 주체적이지 않은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Indieground




그녀는 마침내 방 안에서 거미를 발견하고 그 욕망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모습은 구조적으로 일종의 성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욕망의 해소를 위한 자극에 중독된 그녀의 상태는 주체적일지 몰라도, 입에 묻은 피와 함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렇게 그 모습과 함께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불가피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가선 주체적 욕망의 분출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갈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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