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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Jul 21. 2021

단편영화 <실>

이음이라는 노동, 노동이라는 영화, 영화라는 이음.

<실>

2020, 조민재, 이나연 감독



<실>의 카메라는 인물들과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분명 조민재와 이나연의 이전 작품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나연의 <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의 경우, 언젠가 엄마와 재회하길 바라는 세 남매의 상황 자체와 회상의 모습, 그리고 후반의 마법과 같은 장면을 설득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조민재의 <작은 빛>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거리를 두며 어떤 해답을 찾아 나서려는 듯한 이야기로서 그 ‘거리’의 당위성을 드러낸다.


<실>의 거리 역시 비슷하다. 하나의 중심 이야기가 아닌, 인물들의 상황과 회상의 모습을 위한 거리이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노동자와 그 풍경을 통해 어떤 해답을 찾으려는 듯한 선택으로 다가온다.




풍경이 되는 사건들


<실>에는 중심사건이 없다. 아니, 사건은 있지만 그것을 갈등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건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우리는 그들의 대화로부터 알 수 있다. 명선(김명선)과 현(김현) 두 사람은 명선의 작업실에서 대화를 나눈다.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두 사람, 그런데 현은 남편의 사업을 위해 대구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명선 역시 이제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거나 쉬겠다 말한다. 대화 내용만 본다면 이는 명확한 ‘헤어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대화가 담긴 컷은 웃음으로 마무리되며, ‘하이파이브’까지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포함한다. 이어지는 컷에서는 두 사람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때 이 공간은 명선이 자신이 만든 옷을 사진으로 찍는 ‘노동’의 공간이었고, 여행하는 외국인(사무엘)을 마주치는 ‘만남’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현과의 인사와 함께 ‘작별’의 공간이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공간이 그러한 다층적인 공간이 된다는 사실뿐 아닌, 해당 장면의 구도에서도 발생한다.


두 사람은 프레임 아래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이 장면을 오직 두 사람의 순간이 아닌, 두 사람을 포함한 하나의 풍경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 만남, 작별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공간이기에, 공간을 하나의 감정이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더 나아가 인물이나 상황 역시 한정적인 상태로 두지 않으려는 연출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풍경’일지도 모르며, 이를 하나의 사건이나 갈등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또한 <실>이라는 작품 속 대화의 특징은 사건이나 갈등을 문제 삼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대화 사이의 틈을 보여주는 것, 즉 대화를 진짜 대화로 보이게 만들려는 것이다. 만약 전달하고 싶은 것이 대화에서 드러나는 갈등이라면, 다양한 구도를 사용한 컷들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실>은, 대화 사이에 잠시 생기는, 대화의 일부이기도 한 그 틈마저 보여주며 표현하려는 것이 대화 자체임을 드러내고, 이 역시 삶이라는 풍경의 일부가 된다. (특히 명선과 사무엘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대화로 표현되는 그 모든 것들을 삶이라는 풍경에 넣고 그저 일상의 일부로만 놓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과의 작별 직후, 명선은 셔터를 내리고 잠을 청한다. 그녀는 현과의 대화에서 이제 일을 그만둘 것이라는 말을 했다. 때문에 그녀의 말처럼 누워있는 것은 은퇴의 모습으로도 보이지만, 동시에 물리적으로 끊어진 관계와 공명하며 일종의 고통 또는 죽음으로도 느껴진다.(공간의 색감 역시 그런 의도로 읽힌다.) 곧 밥을 먹는 모습으로 이어지는데, 흥미롭게도 그녀가 닫았던 셔터는 반쯤만 열려있다.


명선이 본 영상에서 사무엘이 설명하듯, 창신동이라는 노동의 공간은 많은 갈등이 있어왔고, 동시에 많은 작별이 있어왔을 것이며, 안타까운 죽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선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삶이었다는 점에서, 기억을 공유하는 그들과의 작별은 단순한 헤어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삶의 일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별 직후 앓는 고통을 다시 삶의 일부로 체화하는 과정을 일상의 모습을 통해 되돌리는 것이다.(그렇게 셔터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고, 식사 직후 밖에 위치한 카메라는 결국 다시 전부 열린 문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실>은 한 공간에 담긴 노동의 과거인 동시에 현재에 대한 기록이 된다.


노동과 옷 


명선은 밤에 사무엘의 영상을 본다. 창신동 노동의 역사, 그곳에 명선이 있었고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명선은 노동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옷을 만드는 노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옷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사무엘의 영상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된 명선은 자기가 만든 옷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명선은 디자이너냐는 사무엘의 질문에 그저 주문을 받아서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명선은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단순히 ‘노동자’라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살던 그녀는 디자이너라는, 더 크게 느껴지는 확장된 노동의 범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작업실로 향한다.


명선은 자신의 옷을 만든다. 그리고 그 옷은 지금까지 이어진 노동의 결과 중 하나이며,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과거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이들의 모습은 일하는 모습으로 시작해 밥을 먹는 등의 일상을 지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현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사무엘이 설명했던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노동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닌, 소통을 통해 하나의 문화와 거대한 시대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 담긴 동대문이나 창신동과 같은 공간은 그들의 노동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사실을 당시의 노동자들이었던 그들의 눈이 아닌,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외국인의 시선으로 말이다. 소통이 부족할 수밖에 없던 경제, 그런데 오히려 다인(김다인)은 명선과의 대화에서 그때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반면 자신의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경제의 성장과 함께 외국인과 대화를 할 정도로 소통의 가능성이 커졌고, 번역기와 같은 소통의 도구뿐 아니라,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소통의 도구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확립한다. 다양한 소통은 다양한 측면에서 ‘나’를 볼 수 있게 하고, 그렇기에 명선이 만든 옷이 그녀를 닮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명선은 옷을 입지 않는다. 어쩌면 <실>은 돌출되어 보일 수 있는 그런 일종의 성장마저도 경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명선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지만, 한 사람의 성장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듯, <실>은 일상과 삶이라는 풍경 속에서 돌출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응시한다.




현(김현)의 공장에서 네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짧은 컷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재봉틀이 쉴새 없이 움직이는 소리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의 소리 사이에 어렴풋이 뉴스로 짐작되는 기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운전자’라는 단어와 기자의 억양을 통해 교통사고와 같은 소식으로 들리는데, 재봉틀 소리 때문에 어떤 이야기인지 오직 추측만 가능하다. 매일 우리가 듣는 사건 사고 소식이 노동의 소리에 묻히듯, 노동이라는 삶 역시 일련의 사건이나 사고일지도 모른다.


노동을 위한 옷은 입어보고, 자신을 위한 옷은 입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위한 것이 일상의 일부일 뿐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없어질 줄 알았던 공장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옷을 만드는 가느다란 실처럼, 그 안에서 이전의 누군가 쓰던 작은 ‘커피머신’도 이어지고 다음 세대 역시 그곳을 통해 시작되며, 또 다른 소통이 만들어진다. 없어질 것 같던 공간. 단절이나 죽음으로 다가설 것처럼 보이던 공간은 다음 세대와 노동의 필연을 알리며, 이 모든 사건들이 삶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그 일상은 전부 나와 우리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이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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