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읽은 '내 마음이 지옥일 때'(이명수 지음)란 책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떤 여자가 그랬는데 자기는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 기준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대. 정의감 그런 때문이 아니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속을 믿을 수 있다는 거지. 섹시하기도 하다네. 의전이나 매너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런 기준을 가진 남자가 후지기는 어렵지 않겠어. 난 그 말 듣고 그 여자가 얼마나 괜찮게 생각되는지. 섹시하기까지 하던걸.
공감해서 어디다 적어놓기까지 했던 글귀이다. 나는 종종 이것을 사회에 대입시켜보곤 한다. 한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말이다.
내가 캐나다에 처음 와서 의아해 했던 것이, 캐나다엔 장애인이 참 많다는 거였다. 버스를 이용하는 휠체어 사용자들을 흔히 보게 되는데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아무도 그것을 불만스럽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최근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오찬호 지음)를 읽다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를 보면서 놀라웠다. 나는 그동안 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나 장치들이 부족한 것은 제도적으로 '아직'(?) 갖추지 못한 문제라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나는 책에서 인용된 사람들, 즉 비장애인들의 불만에 따른 문제제기를 보고 정말 놀랐다.
'장애인씨, 장애인이 이 세상 사는데 특권입니까?... 장애인은 특권이 아니라 일반인이 배려하는 겁니다." 이는 장애인 전용 구역에 주차를 했다가 과태료를 낸 사람이 붙인 경고장의 내용이란다. 지하철에 있는 리프트를 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왜 바쁜 시간에 나타나서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냐고. 간혹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제대로 이용할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며, 심지어 인터넷 기사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안다' 는 유명한 영화속 대사가 댓글로 달리고 많은 사람이 '좋아요'로 호응한다고 한다.
지하철 승강기가 역 출입구에서 떨어진 곳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은 까닭도 지상공간이 줄어들어서 보행자들이 방해를 받는다는 민원이 빗발치기 때문이라고. 휠체어 경사로를 설치하는 일도 당연하지 않은데도 어쩌다 설치가 돼도 불법 설치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적이 있었는데, 행인이 보행에 방해된다며 관계 기관에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위적인 시대를 지나 시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시대에 살면서 어찌 옹졸하게 자신의 편익만을 주장하는 시민의식으로만 발휘되는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는 한때, '홈케어' 간호사로 일한적이 있었는데 열살 아이의 등하교를 함께 했었다. 휠체어를 타는 아이의 집에 아침에 가서 함께 스쿨버스를 탔다. 경련과 호흡기 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언제고 위급시 대처가 필요했기 때문에 24시간 간호사가 상주하는 경우였다. 밖에서 지나다니는 것만 보던 스쿨버스를 탄 첫 날, 나는 특수학교 짓는 일을 허락해달라며 무릎을 꿇은 한국의 학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앞의 책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를 읽다가 동네 레크레이션 센터에 갔다. 주민들을 위한 수영장, 아이스 링크 등의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다. 평소 무심히 지나치다가 유독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장애인용 주차장.
건물 입구 가까운 곳에 장애인용 주차장이 여덟 자리로 마련돼 있다.
그 뒷줄엔 어린 아이와 동반한 부모들의 자리(Reserved for parents with small children)가 마찬가지로 여덟자리 마련돼 있다.
서두에 언급한 '어떤 여자'처럼 사회를 두고 생각해본다. 내가 특정 사회에게 호감을 갖는 기준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로 하기로 했다. 아울러 그 구성원들이 함께 사는 다른 구성원들의 권리에 인색하며 이기적 발상으로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 나는 한국사회가 그런 섹시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