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의 기억
태어나 처음으로 '언어'라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난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엄마 무릎에 앉아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거리에 늘어선 간판들을 더듬더듬 읽었던 날들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쉘부르의 우산, 봉주르, 백조 다방, 장미 꽃집... 엄마는 나의 시선을 따라가며 혹여 내가 간판에 새겨진 글자를 놓칠세라 일일이 함께 읽어주었다.
세상은 잠들기 전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보다도 아름다웠다. '쉘부르의 우산'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못하는 엄마의 무릎에 앉아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글자들을 조합해보는 일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놀이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언어에 눈을 뜨게 된 건.
세상에는 모르는 글자들이 넘쳐났고,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내는 것은 내겐 '신기한 모험' 그 자체였다. 어디를 가든 커다란 글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간판 위주로 읽다가 나중엔 과자봉지에 적힌 함유성분이나 제조날짜도 꼼꼼하게 읽었다.
아빠는 이런 나의 습관 때문에 함께 외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버스만 탔다 하면 눈에 띄는 간판들을 모조리 읽는 것은 기본이고 “아빠, 저건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을 연발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나의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왕성해졌다.
내가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무렵엔 더 많은 단어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한글 뿐 아니라 알파벳까지 읽게 된 것. 그땐 대문자밖에 읽지 못했지만, 외국어가 주는 신비로움은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OCEAN'이라는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오씨에안‘이라고 당당하게 읽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한테 자랑했다. 엄마는 내가 말하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열린 새로운 세상은 그야말로 '베아우티풀(Beautiful)' 했으니까.
그렇게 나이를 먹는 동안 알게 된 단어도 많아졌다.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단어를 배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사랑한 단어들로, 단어가 가르쳐준 세상을 쓰고 싶었다.
늘 꿈꾸었다. 작가가 된 나의 모습을. 그리고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한 그래서 다섯 번째 시집의 제목을 그렇게 지은 조구자 시인처럼 나 또한 글을 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한 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세상의 습도가 조금 높아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긴 글을 쓰는 동안 굳게 닫힌 세상의 문을 '벌컥' 열고 싶다는 무모한 상상은 해본 적 없다. 다만 내면에 감금되어 있는 나를 꺼내주고 싶다는 본능이 어느덧 열망이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그 뜨거운 바람은 이따금 나를 병들게 했고 번식을 멈춘 외로운 세포로 살아가게 했지만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6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열한 살 때 저는 하나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발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예쁜 장면에 많이 나오게 해주시고 화장도 예쁘게 해서 올리비아 뉴튼 존처럼 보이게 해주세요....2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하나님께 편지를 씁니다. 촬영장에 지각 안 하게 해주시고 배우 생활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언제나 배우하고 싶다는 마음 변치 않게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배우가 되는 건 쉽지만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어렵고, 그보다 어려운 건 배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되는 건 쉽지만 좋은 작가가 되는 건 어렵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유명해질수록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 돈맛을 알아버려 인지도만 믿고 예전만큼 치열하게 쓰지 않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신의 이름에 실린 무게 때문에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초심은 작가의 심장이다. 무슨 글을 쓰느냐 하는 문제보다 글을 이루는 문장들이 어떤 마음으로 쓰였는지가 중요하다. 독자들이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나타난 유명 작가들에게 간혹 냉담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틀림없이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글을 오래 쓰다 보면 기교가 느는 건 사실이지만 필력은 오히려 떨어진다. 필력이란 글을 쓰는 능력 말고도 글에서 느껴지는 힘과 기운을 의미한다. 사람이 늙으면 노쇠하듯 필력 또한 세월이 흐르면 힘을 다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운동이 필요하다. 초심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글을 쓰며 살기로 다짐했을 때 내가 먹었던 첫 마음, 그건 대체 뭐였을까.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시간은 한 해 동안 삶 언저리를 돌고 돌다 더 이상 뜯을 달력이 없을 때쯤이 되면 내 안 깊숙이 스며들어 조금씩 썩어가는 거라고, 고로 나는 서서히 부패하고 있다는 걸 요즘은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 유통기한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변질될 거라고 생각하면 오싹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가장 나다운 형태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버텨야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중력의 인질이 되는 일. 중력은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려는 관성이 있다. 이상은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호소할 뿐 나를 구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심스럽다. 만약 내가 이상을 믿고 기다리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인생이라는 시소에서 이상이 무게중심이 되는 날이 올까.
삐걱삐걱- 나는 오늘도 시소에 탄 채 두리번거리는 나를 관찰한다. 은밀하게, 끈질기게. Seesaw(시소)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보다를 뜻하는 see와 그것의 과거형인 saw가 나란히 붙어 한 단어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와 과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비현실적인 기구. 하지만 왠지 알 것 같다.
지금의 내가 1초 뒤엔 과거의 내가 될 테지만 여전히 나인 것처럼. 나는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과거가 되어가고 있음을. 나의 세계에서 현실을 끌어당기는 힘이 셀지, 이상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 셀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글. 제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