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트라우마.
아들러 이론을 바탕으로 한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라며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한다. 개인적으로 <미움받을 용기>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나에겐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대학교 3학년, 22살. 부모님 짐을 덜어들이고자 수학 과외를 2-3개씩 하던 때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아현동에 있는 고등학생 과외를 하러 갔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핸드폰도 꺼두었다. 두 시간이 지난 뒤, 문을 나서고, 버스를 탔다. 핸드폰을 켰고, 작은 아빠, 동생, 엄마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수십 통이 와 있었다. ‘엄마나 동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작은 아빠가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지?‘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문자를 확인할 틈도 없이 동생에게 전화를 했고, 수화기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몇 년간 동생 눈물을 본 적이 없던 터였다. “언니, 잘 들어….. 아빠가 가망이 없대…..” 이게 무슨 일이지? 건강하셨던 아빠가 왜 갑자기?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엉엉 울며 지하철을 타고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들이 열심히 심폐 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희망도 없이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발 한 번만 기적을 보여 달라며 애원하며 기도했다. 의료진들의 의미 없는 노력이 계속되던 중,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친구분과 통화 도중 쓰러지셨고, 갑자기 통화가 안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긴 친구분이 119에 신고를 하셨다고 한다. 죽음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것인 줄 꿈에도 몰랐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임에도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다. 좋았던 추억보다 아버지에게 잘못했던 기억들만 떠올랐다. 나 자신을 무던히도 책망했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은 후회만 가득히 남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날 이후 한 가지 트라우마가 생겼다. 나는 핸드폰을 꺼두지 못한다. 간혹 배터리가 부족해서 꺼지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굉장히 불안해진다. 그 당시 핸드폰을 켜 놨더라면, 과외 도중 달려가 의식이 남아있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큰 딸은 어디 있냐고 물으셨다는 아버지 말씀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박혀 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란 없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있다고 말한다. 정답은 없다.
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다. 그래서 극복하고자 노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저 세월과 함께 조금씩 무뎌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