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고 살기 위해서는 대안을 구해야 했다.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살던 시기, 나는 그분의 생활 습관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다. 지켜보긴 했다. 그분도 나의 습관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길 바라면서.
새벽마다 아버지는 일출을 준비하는 태양처럼 자신을 일으켜 세우셨다.
잠자기 좋은 시간인데 집밖으로 나가셨다.
주무시는 머리맡에 장부책이 늘 놓여있었다. 시시 때때 열어보시는 그 책의 두께가 지역전화번호부책과 비슷했다. 가끔 장부책옆에서 잠꼬대를 하셨는데, 무의식 중에 압박감이 드러나는 눈치였다.
"야~ 이 색기야~ 어~ 엉~ 아함~ "
"어~ 알아~ 써~ 음~~ 아함~"
"이~ 나쁜~~~ 색~~ 이~~야~"
"Zzz"
사업 관련된 관계였을 것이다.
다혈질 아버지는 정신이 말짱하실 때부터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입 밖으로 던지셨던 분이셨다. 흥건히 취기가 올라올 때 원하시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조용히 잠드는 것이 그분의 술버릇이었다.
때문에 엄마가 고생이셨다. 아무 데서나 드러누워 주무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 안방으로 옮겨다 놓아야 하셨으니까. 캄캄한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든 아버지는 눈이 떠지시는 모양이었다. 만취한 상태로 주무셨더라도 다음 날이면 요동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날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사업을 세워가는 시기에는 가게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아니면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까지 가셔서 의류제품을 도매로 떼오기 위해서였다.
사업이 확장되어 의류업, 부동산업과 다른 일들을 함께하던 시기에는 자기 성장을 위해서였다. 요즘처럼 자기 계발 유투브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이 권면하는 운동을 하러 나가셨다. 등산이나 테니스와 골프 같은 운동으로 도시의 새벽을 깨웠다. 무등산에서 퍼오는 청정 자연수를 가족 모두가 마실 수 있는 이유였다.
반면, 나의 알람 소리는 4단계 데시벨을 가진 엄마의 호령 소리였다.
"허니야 일어날 시간이다~"
첫 번째 소리는 연두부처럼 싱겁고 부드러웠다.
두 번째 알람은 밥이 다 되면 압력밥솥에서 퍼지는 증기 소리 같았다.
'칙칙'거리는 소리가 시원스럽고 아직은 유쾌했다.
이 시간 잠자리를 박차고 한방에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누구나 알 것이다. 이런 상황에만 느끼는 아침 잠의 당도가 있고, 이 꿀은 땅후루와 비교가 안된다. 천국처럼 달았다. 현실의 시간으로 30분이던 13분이던 나에게는 분명히 찰나였다. 무조건 10초 지난 느낌말이다.
신경질 섞인 엄마의 세 번째 알람은 나의 모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마음의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가는 아침시간이었다. 이건 마치 붙잡을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오만가지 꿈이거나 사투였다.
세 번째 알람은 어찌나 드센지 엄마가 손에 들고 계신 국자라도 곧 장 나에게 날아올 것 같았다.
그때도 버팅기면? "쾅!"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큰북소리보다 큰 굉음이 방가득 울렸다.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그 소리가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학교 선도부들은 지각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니까. 찍혀봐야 나만 손해였다.
아니, 이런 나에게 아버지는 가끔 등산을 가자고 하셨다.(제가요?) 권유의 포장을 한 명령이었는데 좋았을 리가 만무했다. 아버지 말씀에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얼굴은 죽상이 되었다. 끌려가다시피 따라나섰다.
희한한 현상이자 후기는 정작 아버지를 떠나 서울에서 살 때 나타났다.
룸메들은 잠자리에서 아침 늦게까지 뒹굴면서 잘도 쉬던데, 나는 그들의 성격이 부러웠다. 나도 맘 잡고 늦장 부려봤지만 어김없이 두통이 생겼다.
아버지와 따로 사는 서울살이고 늦잠이나 실컷 자면 되겠구먼, 알고 보니 늦잠 자는 것도 차별적 재주이거나 능력이었다. 마음이 죽을 지경이다 보니 새벽에 내 눈은 절로 떠졌다.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고.
보고 자란 덕분인지 스쿼시운동을 하려고 새벽 5시경에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40여분 정도 버스를 타면 스쿼시센터에 도착했다.
아침 운동 습관을 새롭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육체 건강보다 정신 건강이 시급했으니까.
비밀이 많았던 내가 '기도'라는 걸 난생처음 배워야 했다. 산에서 도 닦는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할 것이다. 다만 나는 산이 아니라 기도하는 본당으로 향했다.
'뭔지 모르지만 본당에서 시작해 볼까? 장소가 좋아 보여. 빛이 드는 느낌도 좋고 말이야.'
아침 발걸음을 스쿼시센터 대신 기도하는 장소로 옮겼다. 첫 아침에는 7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우아~ 사람 생각은 비슷한가? 나랑 똑같은 생각을 갖은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어. 야~'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넓은 본당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잠잠히 기도를 하며 하루를 열였다.
3천 명 정도의 수용인원이 가능한 장소인데,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은 조금 더 빨리 도착했다. 신기한 현상을 목격했다. 시간을 앞당겼는데 기도하는 사람 수가 더 많았다. 호기심이 불거졌다.
'뭐야? 이건? 내일은 더 일찍 와 볼까? 거 참 신통하네.'
진짜였다. 일찍 올 수록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새벽 5시 30분에 시작하는 기도회형식의 예배가 존재했다. 첫날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늦게까지 기도를 지속하셨던 분들이었다.
'새벽 운동 대신 이거 해보자.'
새벽 5시 반부터 본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대학생이 몇 명 없었다. 대부분은 기도할 문제가 많은 40대 이상의 집사님들이시거나 60대 이상의 연륜을 가지신 권사님들과 장로님들이셨다.
간절함을 가질 나이가 따로 있겠는가? 20대라고, 대학생이라고, 항상 진취적이고 언제나 희망적일 수는 없다. 젊음이 있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할 만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간절하다면? 새벽기상! 시도해 보는 것이다.
어찌 보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표출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다들 간절하게 사는 건 아닐까? 줄 서서 맛집을 방문하는 간절함부터 세대에 상관없이 아이돌을 부르는 갈망의 함성까지, 간절함의 불이 24시간 연중 꺼지지 않는 나라가 한반도라는 생각이다.
마치 다 써버린 치약통에서 마지막 한 점까지 짜내 쓰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지구상의 유일한 모습을 가진 한반도.
이 땅이야말로 사실 아프지만 살기 위해 다시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고 가난하지만 또한 부유하고 안전하지만 평화롭지 않은, 이 매운(辛) 나라의 매력은 어쩔 셈인가!'
'음... 한반도! 사랑한다.'
어떤 자기 계발 유투버는 얘기한다.
"몇 시에 일어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눈뜬 이후 어떻게 아침 시간을 보내는지가 중요해요. 무슨 활동으로 채우느냐가 관건이죠." 맞는 말씀이다. 당연하다.
예외의 경우가 있다. 공부가 너무 싫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에게는 수업이 이뤄지는 장소나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꾸준히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활동일 수 있다. 운동하기 싫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운동하는 장소에 100일 출석을 목표로 세우고 딱 5분만 운동하는 거다. 남은 시간은 분위기만 즐겨도 괜찮다. 이런 조건이지만 그에게는 출석자체가 도전일 수 있다.
생활 습관 성형은 장기적 목표다. 처음부터 무리하는 것보다 가늘고 길게 추진하는 계획이야말로 지속가능한 힘을 높여줄 것이다.
말도 없이 100일 동안 매일 5분씩 서로 시선만 맞춰보자. 사람관계라면 사랑에 빠지고도 남을 접촉이다.
나 또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모든 게 우연처럼 이어졌다. 운동대신 선택한 걸음이었는데 집 근처까지 와서 나를 차로 라이딩해 줄 청년부 언니와 인연이 닿았다. 지순언니와 인연으로 새벽에 오고 갈 교통편이 정해졌다. 이로 인해 '나의 새벽 출석'은 선택사항이 될 수 없었다.
언니와 약속이 끼여 있다 보니 의무적으로 일어나야 했다. 4시 반 기상은 필수사항으로 확정되었다.
그런데다 나는 목표지향적인 성향이 필요이상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젊다는 이유로 유연한 성품도 부족했다. 젊을 때는 다들 힘은 넘치는데 요령이 부족하다. 나도 참 젊었다.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4:30분으로 기상 시간을 정했고, 정한 대로 잘 지켰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나는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칭찬하거나 격려할 줄 몰랐다.
"과연 당연한 일일까? 새벽 4:30 기상! 고3 때도 5시에 일어났는데."
요즘처럼 <잠의 기능과 효율>에 대해 인체 과학적으로, 건강적으로 알려주는 연구자들의 정보가 풍성하지 않던 시기였다. 취침이라도 일찍 했어야 했는데 나는 밤 12시경부터 잠들었다. 자정까지 뭔가를 해야 만족을 느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행위 중독자였다.
행위중독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는 '성과'나 '목적' 심지어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특정 행동을 지속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어진다고 오해한다. 행위중독자는 '쉬는 행위'에 대해 안전한 마음이나 평안을 얻지 못할 경우가 많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인정받는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경우도 많다.
결론적으로, 12:00 am 취침 시작하고 4:30am에 기상하는 생활패턴을 유지했다.
하루라도 늦게 일어나서 지순언니의 차를 놓치게 되면? 그 처참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하루 종일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겼다. 다음 날 새벽에 약속된 차에 올라타 다시 성취해야만 나의 참담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졌다. 북한에서는 일상이라고 전해지는 '자아비판'의 습관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피로감을 느끼긴 했지만 젊으니까 버틴 것 같다. 아무리 피곤해도 정해놓은 루틴을 유지하고 지키는 편이 내 마음도 지키는 방법이었다. 쉰다고 쉬어 봐야 쉬는 방법을 모르면 안식을 맛볼 수 없었다. 고기처럼 먹어 본 사람만 그 맛을 아는 것이었다. 만성피로라는 생활 리듬이 떠나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유익 또한 많았다.
다시 옛 시절을 생각할 뿐인데 심호흡이 필요하다.
'후~'
'후우~'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는지 자문한다. 지금은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져서 감사하다.
요즘에는 충분히 자려고 노력한다. 행위중독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졌다.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대학생은 나 혼자이거나 있어 봐야 몇 없던 초창기와는 달리, 년 수가 쌓일수록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직장인, 대학생 할 것 없었다. 무슨 새벽기도가 하나의 운동(Movement)처럼 번져갔다. 장소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는데 이촌동을 뛰어넘어 버렸다.
스타벅스의 폭발적인 개점 확장 시기와 맞물려 더불어 번성해 갔다. 서울시내 주요 지역의 스타벅스 매장마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동 시간 다른 장소의 스타벅스에서 함께 기도하며 아침을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나의 초기 시도는 알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였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정말 사후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그전까지 줄곧 나만의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 말이 없었던 내가 친하지도 않은 대상이었던 '신'께 기도하는 것은 낯설었고 어려웠다. 하지만 정해둔 장소에서 기도 시간을 보낸 후 아침 햇살을 맞이하다 보면 그날 하루만큼은 살아갈 용기와 힘이 생겼다. 기도의 날들이 쌓일수록 삶에 대한 '길'이 보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울증이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었다. 새벽 운동이라는 행로가 새벽 기도로 바뀐 것처럼 나의 갈망 중 하나가 다른 경로를 모색했다. 그 갈망은 다름 아닌 자살이었다. 새롭게 모색한 네비게이션(운항)이 내 생각에는 옳은 방향이다 싶었는데, 목적지를 찾을 수 없는 오류나 다름없었다.
'천국이 있다'는 전제 때문에 생겨난 색다른 갈망 또한 죽음에 관한 것이긴 했다.
간단히 표현해서, 한 시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는 부드러워진 갈망이었다.
설명서와도 같은 성경책 66권*을 혼자서 잘 못 해석한 탓이었다. 신앙적 이해에 왕초보였던 내가 나의 행위나 반응에 따라 <천국 입성 시간>도 임의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예로써, 학업 진행 과정에서 수행 결과가 좋으면 조기 졸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사명이라든지,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개인 업무(?)를 월등하게 수행하고 나면 남들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오산했다. 고통도 눈물도 없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그곳에. (아뿔사~)
66권의 책은 '관계'에 관한 책이지, <1억 원 모으기>나 <하버드 합격을 위한 모든 것>처럼 특정한 목적 성취를 위한 자기 계발서 혹은 가이드 북이 아니다.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던 나라서 책 저자의 의도대로 읽으며 따라가지 않았다. 나의 의도대로 그리고 내가 살아오던 방식대로 발췌하고 해독하고 적용했다. 목적지향적으로 때로는 자본주의적으로, 거기다 내 욕심 살짝 섞고, 앓고 있던 우울증은 msg처럼 추가한 관점이었다.
유대인들도 구약시절동안 나처럼 신의 뜻과 마음을 오해했다. 그래서 신의 말씀을 끝장나게 어겼다. 그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들어갔다가도 쫓겨났다. 여기서 '약속의 땅'의 함축적 의미가 중요하다. 약속을 정하는 주체가 '신(God)'이신데 나는 약속의 땅을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그 땅은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 저를 약속의 땅에 보내 주세요. 천국 가고 싶어요.'
3년 넘게 4시 반에 일어나서 변함없이 위의 '기도제목'을 속삭이듯 올려 드렸다.
기도를 채우는 양동이에 3년을 가득 채웠더니 넘쳐흘렀던지 그 기도가 내게로 되돌아왔다. 죽음의 맛을 알게 된 경험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두들겨 맞고 나서 거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는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이었다.
'5월만 되면 충장로 시가지에서 펼쳐진 그 사진 속 얼굴인데. 완전 일그러졌어. 사진으로 영상으로 볼 때는 믿기지 않았는데, 이런 얼굴이 실제로 만들어지는구나.'
청소년 시절 5월에 얽힌 기억은 특별했다. 오월이 다가오면 광주는 만발한 봄꽃 대신 연기와 매연에 둘러싸여야 했다. 울부짖는 분쟁과 반목의 함성소리가 온 시가지를 뒤덮었다. 대치된 화염병과 최루탄의 요란한 분쟁으로 인해 십 대 학생들의 등굣길조차 방해받았다.
그들과 진압병에게는 끝날 수 없는 시위이자 대응책이었으리라. 양 진영의 입장에서는 각 자가의 처사가 옳았을 것이다.
과연 그들을 지켜봤던 광주의 청소년들에게 그 모든 게 옳았을까? 그 시절의 우리의 공감을 구하기 위해 우리 입장이 되어 우리의 시각으로 설명해 주었던 어떤 운동가도, 정경도, 정부도, 야당도, 심지어 부모님도 계시지 않았다. 공포스러운 역사를 직접 겪으셨던 부모님은 오히려 우리 앞에서 '쉬~쉬~'하면서 숨기려고만 하셨다. 그분들만의 모임을 통해 그분들만의 숨죽인 '한풀이'로 끝낼 뿐이었다.
반면, 도청 시가지 여기저기마다 사진이나 영상물이 떠돌았다. 얼굴과 몸이 사람이 맞긴 한데, 개처럼 두들겨 맞은 모습이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글러진 얼굴과 몸이었다. 스쳐가면서 바라본 이미지가 잊히지 않았지만 나는 현실을 부인하는 편을 선택했다.
'사람 얼굴이, 사람 몸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어. 내가 본 사진이 현실에 일어났다고? 뭔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아닐 거야. 누구도 정확히 말해 주지도 안잖아.'
그 사진들도 과거의 현실이었고 내 얼굴도 유사하게 변형될 수 있었다.
기도하기 위해 나의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같은 장소에서 내가 타야 할 장로님의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새벽 시간애 청년 한 명이 내 앞을 지나갔다. 시간이 흘렀지만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놓친 것이었는데 올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결국 다시 집으로 향했다.
장로님 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순언니는 선교훈련을 받았고 결혼도 했다.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새벽기도를 같이 다닐 수는 없었다. 그즈음부터 대학부 공동체 오빠의 아버님의 차를 타기 시작했다. 장로님의 차는 세단이었는데, 나는 항상 뒷 좌석에 혼자 앉았다. 장로님이 운전하시는 이 차를 올라타는 시간부터가 기도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경외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우는 시간이었으리라.
장로님께 감사한 마음은 변함없다.
그 청년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뒤에서 나를 덮쳤다. 나는 바닥에 눕혀졌고 얼굴과 그 녀석의 분노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무작위로 맞았다.
이런 때 보통
"엄마~"
"사람 살려~"라고 외칠 것이다.
내가 몰두했던 생각은 엄마도, 살려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 ~ "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만 한 없이 크게 외쳤다.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된 지역이었지만 동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녀석도 정신이 나간 상태라는 걸 몇 분 지나 알아차렸다.
"조용히 해"라고 그 새끼가 나직이 말했다.
육체는 그 새끼보다 약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뚜렷했던 내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너, 이러지 마!"
새벽 공기보다 차갑고 선명한 음성이 서로의 정신을 바짝 깨웠다.
그때였다. 녀석이 이성을 다시 찾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얼굴에서 특히 눈 주변을 심하게 몇 대 더 때렸다. 피가 터지고 일그러질 즈음에 그 새끼가 달아났다. 돈을 뺏은 것도 아니었고 그 자식의 다른 의도는 나도 모르겠다. 도망쳐 버린 그 녀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집착한 나의 공(ball)은 '기도'였고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한 시라도 빠르게 천국에 가려는 나의 열망'이 문제였다.
그 녀석이야 어차피 내 소관이 아니었다. 경찰과 사법권에서 형사문제를 해결하는 순차를 생각해 보면 문제 제공자들의 심판은 피해자 소관이 아닌 것이다. 복수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생긴 다기보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연민이 들었다.
미친 새끼를 붙잡아서 내 얼굴을 되돌려 놓으라고 하겠는가?
그냥 불쌍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어쩌다 인간이 저 지경까지 미쳐버렸을까?'
같은 새벽녘에 깨어 있었지만
'니 새끼 인생 참 불쌍하다'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그렇게 찾아 부르던 하나님을 찾아가 네 무릎을 꿇겠구나! 나처럼.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복수다.'
아이러니였다.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운 채 간절히 찾던 대상을 향해 먹구름 같은 의심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생명본능이 일었다.
'이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만큼 맞은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계기가 되었다. 천국을 가게 해 달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하지 말자는 확정적 계기.
'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살자. 죽는다는 기도는 여기까지다. 사는 게 너무 힘들게 느껴져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천국도 아닌가 보네. 이유가 있겠지.'
그때 생긴 트라우마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또 다른 3년의 시간을 채워야 했다. 트라우마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새벽기도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이 두려움을 곁에서 함께 이기며 걸어 준 은인이 지우였다. 고향집에서 살았던 사춘기시절의 나처럼 아침잠이 참 많았을 텐데. 지우는 새벽마다 나를 지켜주기 위해 벌떡 일어나 줬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더 과묵해졌고 우울증 농도조차 변질되었는데. 지우는 나에게 웃음을 참 많이 주었다.
지우 덕분에 호흡은 끊기지 않은 셈이다. 3분도 벅차고 서툴었던 기도가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 되어 버린 후였기 때문에 기도 시간에라도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까 싶었다.
'지우야 많이 고맙고 너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