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훈련처럼 시작된 <인도> 여행
'다시는 오나 봐라. 뭐야~ 이게 여행이야?'
'이런 식의 단체 활동~ 대. 체. 뭐! 냐! 고!'
'인도고 나발이고. holy shit!'
서울로 되돌아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방금 전까지 마드라스*였는데 그곳을 벗어나 서울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인생의 길이에 비하면, 인도 땅을 밟았던 시간은 짧다. 때문에 인도에서의 시간이 초현실이고 서울의 일상은 현실이어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반대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마드라스는 지금 첸나이로 지명을 바뀠다.
마드라스에 10여 일간 머물렀다. 평범한 일상의 1년 정도를 압축한 깊이였다. <인도_10일. zip> 파일 안에 저장된 정신적 스트레스는 일상으로 치면 1년의 용량과 맞먹는 것 같았다. 그간 내면에서 벌어진 '마음전쟁'은 매 시간마다, 초를 다퉈 발생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전쟁의 연속이었다.
번민과 고통의 체감 지수는 빈번하게 정점을 찍었다.
현장에서의 시간은 10여 일이었지만, 인도로 출항하기 2달 전부터 서울에서 각 팀을 구성했고 현지에서 해야 할 미션에 관한 준비를 했다.
나는 뱃사람 같았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뚫고 머나먼 뱅골만*까지 원양어선에 올라 일을 마친 선원이었다 해도, 나는 같은 다짐을 했을 것이다.
'다시는 이 따위 배 같은 건 타지 않을 테야! 피곤하다! 이렇게 힘들 수가? 인도까지 갔는데...'
어획량의 성과만 봐서는 신나서 날 뛰어야 할 판이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지쳐버린 뱃사람이 나였다.
오히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엄청난 싸움을 치른 대가로 거대한 물고기 '마를린'을 잡긴 잡았다. 한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어 떼를 만났고, 마를린의 모든 살을 빼앗겨 버린 그 노인말이다. 웅장하고 멋진 전리품이 서글프게도 앙상만 가시로 변해 버렸다.
바다 한가운데 거친 파도 속에서 노인은 마를린과 대치했다. 숨 막히는 힘 겨루기를 통과해야 했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막막한 싸움이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노인의 온 힘과 마음을 쏟아 내는 그 시간은 온 우주가 정지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대상은 강한 적, 마를린. 이 골리앗과도 같은 대어와의 전투는 안간힘을 쓴 끝에 기적처럼 끝났다. 아름답고 거대한 마를린과 함께 금의환향하면 좋으련만, 노인의 귀환은 허무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던 시절 나는 젊었다. 정신적 가치보다 눈에 보이는 면류관에 매혹되기 쉬운 젊음이었다. 나의 얕은 마음과 달리 깊은 노인의 심중을 헤아리려면 세월이라는 가치가 필요했으리라. 무엇보다 나는 노인과 달리 원양어선을 처음 타는 초짜 선원이었다. 젊은이에게 젊음을 주는 것은 아깝다고 했다. 대가를 지불하기도 전에 지혜를 줄 수는 없으니, 젊음은 찬란하게 흩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름답겠지만, 젊기에 참 미숙했다.
나외에 다른 친구들은 돌아가는 같은 비행기 안에서 다양한 빛깔로 비행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싱가포르 항공사의 친절한 서비스를 누리느라 기내식이나 제공음료를 마음껏 먹거나, 그간 친해진 동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틈을 기다렸다는 듯 기내에서 선물을 주문했다. 여유로워 보이는 동료들 가운데 나의 존재가 투명한 물컵의 수면을 떠다니며 섞이지 못하는 기름덩이 같았다.
표정까지 굳어 있던 나는 의기소침해지나 싶더니, 금세 차가운 마음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불현듯 화가 났다. 복합적인 감정은 밀물처럼 계속 마음을 파고들었다.
고독하게 두 손을 불끈 쥐면서 마음의 다짐까지 꽉 붙들었다.
'다시는, 결단코! 신이고, 공동체고, 그게 뭐든, 아니 절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을 테다. 인정, 인정! 신의 존재가 있다는 건 인정. 이렇게 나보다 괜찮아 보이는 대학생들이 많다는 것도 인정. 하지만 나는 달라. 돌아간 이후로 발길을 끊으면 그만이야.'라는 생각만 돌림노래처럼 맴돌았다.
도착 시간만 벼르고 있었다. 똥 마른 사람이 기내의 공용화장실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때였다. 예쁘고 날씬한 스튜어디스가 다가왔고 간식을 주었다.
"Thank you! It looks delicious."
기분이 별로일 때 칩 스낵은 좋은 제안이었다. 한 입 물었다.
'우웩~ 인도 맛이야. 적응 너무 안돼서 괴로웠던 인도 향신료~ 잔~ 아~ 요~. 흐흐흑~. 과자까지 인도 맛을 넣어 주면 어떻게 해요? 대체 언제 도착하냐고? 엉엉엉~'
인도로 떠나기 전 나의 의사를 분명히 알렸다. 공동체 훈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이다.
"이번 인도에서 이뤄질 훈련에는 참여할 수 없어요. 참가비도 없고요..."
내 의사를 전해 들었던 공동체 리더마다 확언을 했다. 나는 내 상황을 솔직히 말했고, 분명 당사자인 내가 안된다고 한 것인데. 그들의 확언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되려 '내가 뭘 모른다'는 투였다.
당사자의 의견이 아니라 자신들의 확신이 나의 미래가 될 거라는 막무가내 같은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했다.
"그런 이유라면, 너는 인도에 갈 거야."
'이건 뭐야? 내가 돈 없어서 못 간다는데, 그대가 나를 알아요? 내 참.'
'인도는 내생에 단 한 번도 가 볼 생각조차 없었다고요.'
씻고 자는 게 불편하다 싶으면 대학 시절의 M.T조차 피하려고 노력했다. 별 수 없이 참석하게 되어 화장실과 잠자리 사용할 때면 후회가 막심했다.
나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아는데 인도에서 단체 생활이라? 불참자가 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마음의 감동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이다. 몇 가지 계기를 만나면서 마음이 동했다. 결국 리더들의 확언대로 10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함께 움직이는 '미션활동'에 내가 끼여 있었다.
마드라스는 공항부터가 최악의 장면이었다. 지금의 첸나이국제공항*은 으리으리하게 변했지만 당시에 공항은 한국의 80년대 시골의 터미널 수준이었다. 싱가포르 항공편을 타는 시간에는 고급 호텔 수준의 깨끗함과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받았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인도 현지에 대한 워밍업이 시작되었다. 공항에 덜렁 내려와 보니 무슨 유배지에 붙잡혀 온 대학생 무리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숙소 또한 현지 사람들의 성대한 '결혼'이 거행되는 '예식장'이었다. 그런 숙소에서 생활하는 과정을 통해 '피난민의 삶'을 단기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강당처럼 큰 공간에 여학생들 모두가 잠을 자기 위해 각 자의 짐을 풀었다. 남학생들도 비슷하게 큰 공간 하나를 사용했다. 침대도 침구도 없었고 식당 공간도 따로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짐을 한쪽에 정리하면 그곳이 모임 장소가 되었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다가, 팀 모임도 했다가, 식사 시간에는 식사를 했다. 잠잘 시간에는 다시 침실로 사용했다. 4방향의 벽면 중 긴 쪽 2개의 벽면을 평행하게 기준을 잡아 머리를 맞대는 곳으로 삼았다.
뉴스에 통해 장마철이면 종종 보도되는 그 장면이었다. 긴급 시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공간에서 줄지어 잠자리를 만드는 모양새대로 우리의 잠자리도 구성했다. 이 상황은 인도 체험의 한 가지 허들이었다.
천장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낮에는 외관만 문제였다. 천장 위에서 살림을 살고 있던 동물들 짐작컨대 생쥐들이 밤이 되면 계주를 하는 모양이었다. 일자로 쭉쭉 나란히 뻗어서 자고 있는 단체 숙소의 첫날 밤은 비명소리가 파도타기처럼 일었다. 비명 소리는 방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파도를 탔는데, 그 날샌 생쥐들의 달리기 방향과 일치했다. 달리는 소리와 비명 소리 모두 굉장했다.
"아악~"
"아아아악~"
"꺄아악~"
구멍 근처에 뭣도 모르고 잠자리를 잡았던 친구가 있었다면 그 친구의 공포를 지금이라도 위로하고 싶다.
다음은 일용할 양식에 관한 허들이다. 우리는 각자 소량이지만 한국 반찬을 챙겨 왔다. 매 훈련마다 자원한 사람들로 구성된 '식당팀'이 따로 있다. 식당팀은 다른 팀에 비해 어려운 일인 만큼 팀워크는 끈끈하고 좋았다. 인도의 식당팀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 팀은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아침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한국 스타일의 반찬과 음식을 준비할 기대감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인도 예식장에 이미 현역 식당팀이 계셨고 그분들에게 도움을 구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인도 식당팀은 한국 학생 식당팀보다 먼저 일어나셔셔 중요한 음식 준비를 완료해 두셨다.
첫날은 손님을 대하는 '인사 치례'라 생각했고, 두 번째 날부터 음식만큼은 한국팀이 만들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얀 이와 선한 웃음까지 드러내 보이며 인도식의 '긍정'을 표시했다.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인도 사람들은 긍정을 표현하는 방법인데, 우리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었다. 좌우로 살짝 가볍게 흔드는 모습인데, 이것 또한 긍정의 의미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결국 기간 내내 그분들이 만든 음식을 먹어야 했다. 죄다 인도식이었다.
인도 향신료 맛에 대한 우리 학생들의 입맛은 대부분 동일했다.
"우웩~"
우리는 집에서 엄마나 할머님께서 만들어 주시던 음식도 투정을 부려봤던 녀석들이었다. 거룩하고 착하게 사는 훈련에 참가한 대학생일지라도 훈련생이지, 졸업생은 아니었다. 출국 전의 음식들이 아른거렸다.
숙대 근처 와플하우스의 와플 & 아이스크림, 이촌역 스마일 떡볶이의 떡.튀.순,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의 햄버거 & 삼각김밥, 우동집의 우동 & 유부초밥, 벤츠몰고 퇴근하시는 신동아 지하상가의 분식집 사장님의 변함없는 순대, 라면 & 오뎅, 그 사장님 옆집의 보글보글 끓는 닭곰탕 & 깍두기, 그 건너편에 가면 노오란 호박죽...
'흑흑~ 먹을 게 얼마나 많은 서울이었는가'
현지인들이 손수 만드시느라 인도향신료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맛있어지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현지에 도착하기 두 달가량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인도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인도 현지에서 무탈하게 잘 지내게 해 주세요."
"팀원끼리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나에게 응답된 기도는 한 가지였다. 현지 사람 즉 인도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시간만 마음이 편했다. 팀원들끼리 움직이는 것도, 현지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 모든 과정이 내게는 괴로웠다. 그 현장이 서울이었다면 하루 밤 보낸 후 짐을 쌌을 것이다. 핑계를 대서라도 집으로 가버리려고. 마드라스에서는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오직 견뎌야 했다.
생각해 보니,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 참석하는 선수도 한 번의 경기를 위해 각고의 훈련을 한다. 경기가 치러지는 현지에 도착한 선수들이 훈련 준비를 했다 한들, 올림픽경기의 현장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원하는 대로 메달을 따고, 경기 기간 동안 단꿈에 젖어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준비한 훈련 시간보다 더 격하고 긴장되는 또 다른 시험대 올라가는 느낌일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에게 태릉선수촌과 올림픽 현지 중 어느 장소가 더욱 집 같을까?
젊음이 넘치는 대학생들 우리에게 주어진 종목은 육체적인 경기는 아니었다. 전인격적인 종목이었는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랑'이었다.
나를 포함한 참가한 대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있던 병은 '낮은 자존감', '비교의식'등이었다. SKY를 다니던 IVY League의 현역 학생이던 이 병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사실 S대 다니는 친구들이 이 병에 관해서는 중증일 경우가 많았다. 전국의 최고들만 모아 놓고 다시 경쟁하는 세상은 그들에게는 낯선 환경일 테니까.
그런데다 각 자의 연약한 점을 다루기 어렵다 보니, 상대가 갖고 있을 약점을 짐작하거나 이해할 마음의 여유 또한 부족했다. 각 자가 자신의 학교라는 환경에서 비교하던 마음을 공동체에 그대로 들고 오는 것이었다. 그 상태로 단 2달 준비하고 인도에도 함께 와 버린 것이었다. 감추는데 애를 쓰는 각 개인들이 100여 명 넘게 모여 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경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공감되는 말씀이었다.
우울증이 심했던 나는 스스로를 잘 사랑하는 방법조차 몰랐다. 20대 청춘들 모두 신을 안다고 해서 바로 신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씀을 통해 사랑에 대해 배운다지만 '사랑'이 배운 즉시 꽃을 피울 수 있는 가치는 아니었다. 무엇이든 배우는 족족 터득되고 실천까지 초고속으로 이뤄진다면야, 한국 어디에도 꼴등은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에 비해서는 매우 희망적이지만.
누군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던가. 사람이 아프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기 보호의 장벽도 높아진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을 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에 편한 행동이나 말을 하기 쉽다. 게다가 이런 언행에 대해 제지당하거나 충고를 듣는 것에 대해 인내심이 없어진다. 결론적으로 아픈 청춘들끼리 우글대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 최악이거나 망한 것이었다.
'사랑은 개뿔!'
일단 상대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데. 상대도 나에게 마찬가지일 테고. 10여 일이라고요? 하루도 힘들었다. 환경 낯설고 음식은 집이었다면 버릴만했고, 최고 리더께서 제시하는 목표는 고고하다 못해 불가능했다. 일정은 얼마나 빡빡했던지 3일째 밤부터는 생쥐들이 날뛰어도 잘들 잠들었다. 그 와중에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학생도 있었는데 공감이 아니라 야유가 퍼부어졌다.
"야~ 그냥 안 자?"
"니 소리가 더 무서워!"
"자! 그냥 자자~"
모두들 마음속에 앓고 있는 문제가 있다 보니, 관계 속에서 그 병난 곳들이 부딪히면 아팠다. 마음 아픈 게 문제 되는 근거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프긴 아프다는 것이다.
나는 '~척' 병이었다. 집에서부터 엄마를 제외하고는 내 감정을 제대로 아는 타인은 없었다. 나는 늘 그렇듯 그곳에서도 표현을 안 하는 것이 병이었고 그 병으로 스스로가 고통스러웠다. 불평불만이 끝이 없는 팀원을 볼 때면 미움과 짜증이 이글거렸다. 진심으로 그 입이 다물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면 상태는 그 팀원과 같았던 나였다. 나의 미움은 질투에서 기인했다. 나도 정말 힘들지만 애써 '~인 척'을 하고 있으니까 비슷한 노력을 하지 않는 상대를 보면 질투와 미움이 생겼다.
'너는 왜 내가 하는 노력을 안 하는 거야? 저렇게 투덜거리는 데 팀장의 위로까지 받는다고? 완전 불공평해.'
알고 보면 상대는 모든 상황에 반대로 반응했던 내가 가장 싫었을 수 있다.
'뭐 저런 가식적인 애가 다 있어. 지가 제일 성숙한 척하고 있네.'
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이렇게 생각했다면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인 척'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맛없는 데 '먹는 척', 불편해 죽을 지경이지만, '잘 지내는 척', 사랑하고 싶지 않은 너와 팀장이었지만, '사랑하는 척'...
이런 고행을 치르다 너무 피곤했던지, 어떤 때는 입신*을 체험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나의 첫 팀장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다. 나로 인해 힘들었다고 했는데 나도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네가 힘들었어.'
이렇게 각 자의 아파왔던 내면 상태와 서로의 미숙한 성숙도를 확인하는 장소가 마드라스였다. 내가 힘들다, 네가 힘들다, 할 것 없이, 현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쉴 새 없이 힘들었다. 모든 일정을 함께 소화하면서 각 팀이 하나 되는 것은 그중 가장 고난도 훈련이었다.
한 가지 더 있었다. 우리가 머무르는 숙소는 물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매일 씻을 수 있는 물의 양이 한 동이 정도로 정해졌다. 그 와중에도 식사를 건너뛰면서 '남자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다 들킨 여학생이 있었다. 목소리가 나와 비슷했던지 동기 남자 친구가 서울로 돌아와서 남긴 후기였다.
"나는 오권사인 줄 알았네~"
오권사라는 별명이 붙은 배경 또한 내가 시련의 밤을 견뎌낸 탓이었다.
시험 볼 때도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모든 언어가 진심이었다. '철야 기도'라는 게 있었는데 진심으로 날 밤을 꼴딱 새웠다. 남과 여과 따로 모이는 모임도 아니었는데 같이 기도하면서 철야를 지났다.
기도받으시는 대상이 낯설다 보니, 기도는 3분만 해도, 할 말이 없어졌다. 기도하는 척을 하던지 멍 때리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정쩡하게 반응 중인데, 갑자기 모인 사람들을 삥 둘러앉혔다. 다음은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기도하라고 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오빠였다. 누군가 특히 남성이 나의 피부에 닿는 것에 예민해지는 결벽증이 있었다. 엄마 외의 타인과의 접촉은 무조건 싫었다.
눈 찔끔 감고 남학생이 내민 손을 잡았다. 오빠의 손은 수분기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로켓처럼 지붕을 뚫고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기도는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밤을 새우자 새벽이 오긴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침 길에 동기들끼리 아침 식사를 한다면서 따로 밥을 먹자고 했다. 식사도 시켜야 하고 서로 인사도 하자니, 기도가 아니라 말을 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도 놀랠 지경이었다. 동기 중 항상 친절한 진우가 내 목소리를 콕 찝어 냈다.
"허니야 ~ 너 밤새 기도를 얼마나 한 거야? 목소리가 다 셌어. 오권사님 목소리인데."
'뭐라고? 기도? 나 기도 할 줄 몰라. 철야 내내 1-2분 하고 나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버틴 거야.'
"어?"
당황했지만 더 이상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오권사가 무슨 의미인지, 왜 나를 벌써 할머니처럼 부르는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럴 기운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 뒤로 대학부 전체가 나를 '오권사'로 생각했다.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하나하나가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나를 최전방에 데려다 놓았다.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상황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인도 떠나기 전 동한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 가진 돈은 다 털어 참가비로 썼다. 무슨 믿음이었는지 준비기간 2달 동안 내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었다. 용돈은 이미 끊긴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13살 때처럼 교회 나가는 일을 반대하셨다. 믿음을 갖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하는 활동에 참가하는 딸에게는 용돈도 주실 수 없다고 하셨다. 부모님의 용돈의 노예가 된 자녀에게 수혈을 끊어 버린 셈이었다.
버스비도 없는데 같이 모여서 준비모임을 마쳤던 친구들은 햄버거를 먹으러 간다고 했다. 기도를 모르지만 나는 본당에 혼자 앉았다. 몇 시간을 울었는지, 그게 울 일인가?
'나는 돈이 없다. 훈련비로 다 내 버렸다. 버스비도 없다. 햄버거는 먹고 싶다. 여기서 이러고 다닌다고 집에서는 용돈도 끊었다. 지금은 과외 알바도 짤렸다.'
1분만이라도 솔직해졌다면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역시 초보였다.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인도에 도착했고 다시 서울로 살아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수도꼭지처럼 열린 눈물샘이 마른 날은 없었지만 돈 없이도 살아가고 있었다.
불끈 쥐었던 손과 마음은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에 풀리긴 했다. 친구의 어머님이셨던 욕도 잘하셨지만 간식도 잘 챙겨주셨던 분의 인도로 어린 시절 잠깐 경험했던 교회에서 얼굴 정도만 알고 인사만 나눴던 친구가 있었다. 동기였고 지금은 해외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광수인데 광수가 나를 기억하고 알아봤다.
"광주라고? 어.. 너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아?"
"뭐?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보긴 어디서 봐. 야 기억도 하지 마. 반갑지 않을 거 같은데. 기남이랑 놀던 시절 아냐?'
끈질기게 나의 호구 조사를 하더니 결국 그 교회 이름을 찾아냈다.
"야 허니 너 나 기억 안 나? 나는 이제 알았다."
광수가 나에 대한 기억을 정확히 끄집어 내자, 나도 광수의 어린 시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정말 개구쟁이처럼 교회를 다녔고 광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에 얼굴도 귀엽고 잘생긴 편이어서 인기는 있었겠지만 학교든 교회든 성실하게 다닐 거 같았다. 광수를 만나고 나서 나는 교회 출석에 대해 금지 명령을 받았다. 둘 사이의 기억이 길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런 광수가 비행기 좌석으로는 옆이었다. 그때 대화를 나눴는데, 광수의 몇 마디가 나의 굳은 마음을 풀어 주었다.
지금은 시간이 오래 지나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한 두 마디 정도였는데 마음이 녹았다.
'아 내가 잘못 생각한 거구나. 모든 걸 끝내겠다고 할 시간은 아직 멀리 있구나. 엉엉~ 그래도 힘들어.'
인도 여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 방학마다 1년이면 해외로는 두 번, 국내로도 두 번 등 훈련은 계속되었다. 되돌아보면 그 모든 여행을 통해 돌덩이 속에서 갇혀있던 나라는 조각품을 꺼내기 위해 스스로를 작업대에 올리는 시간이었다. 통과하는 시간마다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해산한 여인처럼 다음 여행을 준비했다. 대학부에서는 마지막 여행, 북경과 연길까지의 여정은 길고 깊었다. 하지만 이 시간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완전 다른 모습일 것이다.
지난 여행에 대해 매 번 자원하지 않았다면, 수영을 모르는 사람이 지구의 70%의 바다를 모르는 것처럼 나 또한 나 자신의 가능성의 70%는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