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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탕 Feb 18. 2021

일본 유학, 짠내 나던 나의 대학교 시절

일본에서의 대학생활(1)

뭔가에 속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나는 자칭 비속 주의자이다.


어릴 적부터 단체 활동을 특히 좋아하는 한국인 사회에 끝내 적응을 못했고,

초/중/고등학교 12년을 꾸역꾸역 버텨내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내 앞길에 뻔히 보이는 수많은 조별 과제와 엠티, 회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안을 찾다 보니, 일본어는 곧 잘했던 나, 자연히 일본 유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게 남들보다는 늦게 시작한 일본 대학교 입시 준비,

준비 자체에도 돈이 많이 들었지만, 대학교 원서를 넣는데만 해도 한 번에 3-5만 엔 즉, 우리나라 돈으로 30-50만 원은 족히 넘어갔고,

유학 시험(EJU) 점수와는 별개로 원서를 넣은 대학에 직접 방문해 면접과 시험을 봐야 했었다. 더군다나 그때 당시(2009-10년) 엔화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원서 비용조차 부담이 되어 딱 2군데에 원서를 넣었었는데, 그중에 거짓말처럼 한 군데에서 합격 통지가 왔다.


수능을 본 것도 아니고, 선택지가 딱 하나밖에 없었던 나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합격한 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심했다.

그 대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있는 집안 아이들이 온다는 유명 사립 대학교였다. 물론 나와 같은 케이스로 시험을 봐서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도 많지만, 같은 계열 초/중/고등학교로 부터 시험을 치지 않고 입학하는 케이스도 많았다.


그렇게 19살의 어린 나이에 혼자 일본으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접하는 대학교가 모든 이들에게 설렘 그 자체 이겠지만, 이국에서의 대학생활은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해리포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5개월쯤 지나자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금전적인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때 당시 엔화가 100엔=1300-1500원에 육박했고, 부모님이 100만 원을 보내도, 일본 돈으로 8만 엔 정도가 남았고 그 안에서 월세와 전기세, 생활비 등을 전부 해결해야 했었다.

도쿄의 살인적인 물가와 엔고(円高)가 합세해서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 대학교 생활의 로망이라고 하면 로망이랄 수 있는 서클 활동(동아리 개념)이 나에겐 사치였었다.

연회비가 약 2-3만 엔 정도에, 뭔가 모였다 하면 2-3천 엔이 깨지는 식이었는데, 그때의 나에게 2-3천 엔이라고 함은 거의 일주일 식비였었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서클 활동은 하지 않았다.

서클 활동 대신에 간간히 통역 알바나 전시회 알바를 했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학교 한국인 유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주머니 사정으로, 다들 힘들어했었던 것 같은데, 유난히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유학생이고 현지 학생이고 있는 집안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


그 애들은, 2-3천 엔쯤 한 끼 식사로 거뜬히 내고 매번 쇼핑을 하러 가기도 하고, 학기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품 브랜드의 신상을 학교 책가방으로 가지고 왔었다.

도시락도 싸 다니며 참 알뜰하게도 살았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명품에 관심도 없고, 나 스스로 돈을 벌기에 별 생각이 안 들었을 터인데, 그때의 나는 힘들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기에, 솔직히 그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대학교 1학년이 끝나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겨우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도 하며, 이제 적응하나 싶을 즈음.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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