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자가 격리 면제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한국에 다녀왔다.
코로나 사태 이후 2년 만의 귀국.
인생의 못해도 30프로 이상은 외국에서 지냈었는데, 이렇게 귀국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리웠던 한국땅을 밟자마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냄새, 영국과는 다른 질서 정연한 모습들,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한국 사람들
그렇게 눈물 나게 그리웠지만 오랜만에 봐서 너무나도 어색한 풍경.
이것이야 말로 정체성의 혼란 그 자체였다.
그것도 잠시, 오랜만에 귀국해서 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들, 사야 할 것들 등
마치 결석했던 학창 시절의 아이가 나머지 공부를 하듯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동안 못 뵈어서 한층 늙어계신 부모님, 할머니, 또 언제나 반가운 고등학교 친구들 등등
눈에 담고, 마음에 담기 바빠 정신없이 흘러간다.
보통은 이렇게 흘러가다가 살던 나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2년 만의 귀국이니 만큼 한 달 하고도 보름을 더 있었기 때문에 좀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반 정도를 있다 보니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나날이 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한 것 같다.
홈그라운드에 오니 2년 동안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1. 외적인 변화가 있었다.
곱슬머리를 기르게 되면서 매직 스트레이트한 머리와 나의 곱슬들이 서로 융화되지 못한 채 뒤엉켜 있었는데,
밑에 남아있던 스트레이트 부분을 히피펌을 하여 곱슬들의 컬 패턴에 맞추었다.
이로써 나는 완전한 곱슬머리가 되었다.
2. 쓸데없는 소비가 줄었다.(특히 옷)
예전에는 한국에서의 쇼핑이라 함은 옷 쇼핑을 주목적이었는데, 아무리 옷을 사려고 해도 사 지지가 않았다.
스타일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지금 가진 옷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커져서 그런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엄마에게 등 떠밀려 사게 된 옷 몇 가지와 영국에서 입을 수 있을 만한 두터운 니트 등 몇 가지 기본 품목을 제외하고는 옷을 사지 않았다.
영국에는 워낙 없는 것들이 많아 소비욕 때문에 마구 쇼핑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3. 그리고, 인생에 대한 방향성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하루를 무사히 끝마치고 간간히 다가오는 이벤트를 기대하면서 살았는데, 영국에서 살면서 이런 생각이 변화된 것 같다.
매일을 특별한 하루처럼, 매일을 내가 주인공으로,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변화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
바로, “나다움”
나의 자연 곱슬머리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더 이상 매직을 하지 않게 되었고,
내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어울리는지 알게 되면서 옷을 사지 않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나다운 인생, 내가 주가 되는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없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위의 3번째 인생에 대한 방향성의 변화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작은 생각의 변화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나 자신에게는 위의 어떤 외적 변화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큰 변화였기 때문에 나는 반년을 꼬박 열병처럼 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
이 고민은 줏대 없이 살던 나에게는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이때문에 이제껏 보다 더 살아있음을 느끼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느껴진다.
아직도 나는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이 끝에는 좋은 것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제는 두렵거나 아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