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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의숲 Feb 19. 2024

요가를 해라.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의 요가 인생이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요가의 시작.


동네 정형외과에 거의 실려가다시피 신랑의 부축을 받고 겨우 갔다. 제 자리에서 뒤집기도 돌아눕기도 힘든 극심한 극성 염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 셋은 그저 엄마 아빠를 따라 즐겁게 나들이 가듯이 병원으로 따라나섰다. 아파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어째서 내 몸의 하반신을 움직이는 것이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걸까. 내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아이 셋은 어떻게 하지? 독립하겠다고, 내가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는데 또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며 괴로웠다.


하긴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마음이 굉장히 아픈 시기였다. 결혼해서 아이를 셋이나 줄줄이 낳아 기르느라고 몸이 망가져 있었음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나에게 결혼이란 사랑하는 남자와 남은 인생을 알콩달콩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나누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혼 후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는 생각보다는, 무언가 또 다른 사회적 역할들에 나를 묶어놓은 것 같다는 후회감이 감돌았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친정 부모님은 내 삶에 더 관심을 가지셨고, 시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단 둘이 알콩달콩 있는 시간보다는 무언가 그 이외의 삶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밖에서 직장일을 하고 있는 남편보다 집에 있는 내게 그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예전에 누군가 내게 해줬던 말이 정말 사실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 왔다.


“주방에 지휘자가 두 명이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 되어 있어. 아예 네가 주방과 아이들과 살림들은 잊고 나가서 일만 하든가, 아니면 둘 다 온전히 해내든가. 친정이나 시댁에 맡기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 왜냐면 주방에 command center가 둘이잖아? 배가 산으로 가는 거야. 그 등살에 신랑이 죽어나는 거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내가 휴직을 하고 들어오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렵지만 독립을 결정했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밥 풀과 고추장이 더덕더덕 묻어 있는 모습이라도, 일단 나는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을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내 결혼의 목표는 다시 ‘온전한 독립’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내 살림에 사사 건건 간섭하시던 친정어머니와 2년여간의 정신적인 물리적인 독립과정을 겪느라고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렇게 힘들게 친정과 서로 간의 거리를 만들어내자마나자 곧바로 시댁과의 거리 설정 또한 문제가 되었다. 아니, 남편과의 다툼을 거치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단어와 사회적 제도 아래 우리가 전혀 다른 꿈을 꾸었던 완벽한 동상이몽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 초반, 남편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원가족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부모를 함께 잘 보살피면서, 자신의 여자들이 서로 사이좋게 살아내는 그림이었던 듯 느껴졌다.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와 아내가 알콩달콩 재미있게 잘 사는 그런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가족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친정의 간섭에 지치고 온전한 독립을 위해 아이 셋을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온전히 길러내기 위해 정신분석까지 받으며 고군분투했던 나는, 더 이상 그런 결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생활적으로 가치관적으로 모든 면에서 기존의 가족에서는 벗어 나와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을 원했다. 즉, 결혼은 나와 그가 기존의 가정에서 온전히 ‘어른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온전히. 물론 여전히 당신들에게는 아들 딸에 불과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사회적 역할과 멍에(?)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자식이란 이름 하에 통제받아야 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를 살펴보면, 그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던 내 바람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이야 몇 번의 고비 끝에 잘 해결되어 서로 타협점을 찾아 나름 평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 당시의 신랑은 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오랜 기간 냉전을 이어갔는데, 아이 셋에 시달리랴, 친정 부모에 시달리랴, 신랑에게 위로를 받지 못하고 냉전까지 치르는 통에 그로 인해서도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그렇게 복합적인 나의 상황들이 집약적으로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 ‘망가진 몸’이었던 것이었다. 내 몸이 나의 마음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통로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내 허리가 망가졌구나, 내 몸이 망가져버렸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망가진 몸과 망가진 마음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리학에서 <몸은 기억한다>라는 책을 만났다. 강렬한 감정적인 트라우마가 우리 몸에 저장된다는 이론을 펼친 미국의 저명한 신경외과 의사는 ‘요가’를 심리 치료 방법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었다.

또한 , 전환이라는 병명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들과 멀어질 경우, 또는 극심하게 억누를 경우 신체 질환으로 발현되는 병이었다. 시신경에는 문제가 없는데 실제로 실명하거나, 근육에는 손상이 없는데 마비되어 쓸 수 없는 경우 등, 예시는 너무 다양했다. 그리고 그들이 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치료함으로써 몸의 기능이 치료되는 임상사례들을 보면서 나는 혹시나 이 망가진 허리가 나의 피폐해진 마음과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허리에는 복대를 차고 응급상황을 몇 번을 넘기면서, 아이 셋을 혼자 돌보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허리 때문에 정형외과를 들락거리던 어느 날, 허리 물리치료를 받고 힘겹게 나오는데 그 앞에 요가 센터가 눈에 띄었다. 전에도 요가원을 다녀보기는 했지만 항상 재미가 없고 루스하고 지루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매일 스트레칭만 하고 별다른 감흥도 없고, 오래 다녀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은 운동 같지 않은 운동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친 내 허리를 살리기 위해 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 요가학원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신기하게도 어떤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가를 해라. “


그리고 나는 무엇에 홀리듯이 바로 들어가 요가학원을 등록했다. 그 후로 혹독한 다이어트와 요가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느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했나? 이제껏 나는 요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요가는 스트레칭도, 루스 한 운동도, 정적이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엄청난 근력을 필요로 하고, 강도 높은 운동이며, 굉장히 동적인 정신 활동을 필요로 하는 어떤 정신적이자 육체적인 활동이었다. 그렇게 나는 요가에 대한 오해를 풀어나가며 서서히 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내 망가진 몸과 마음을 되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단 육체적인 나의 ‘몸’을 살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요가 #요가라이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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