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 요가)
난 요가를 통해, 오래된 진리이자 명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책은 안 읽은 사람이 아니다.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내가 요가라는 것을 몰랐다면, 아마도 편견이라는 것이 생길 리도 만무했겠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경험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 요가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요가는 '스트레칭이자 유연한 사람들이 다리를 찢고 구부리는 운동'이라고 결론 내려왔었다.
아, 책 한 권만 읽어서, 그래서 내 세계에 갇힌 사람이 바로 나였구나
그것이, 나의 첫 충격이었다. 차투랑가를 해낼 수 없고, 우르드바 다누라사나를 해낼 수 없고, 시르사사나는 물론, 그 모든 것들의 세계가 나를 단번에 겸손하게 만들었다. 산스크리트어부터가 그랬고,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하는 대부분의 포즈가 요가의 아사나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점점 더 겸손해지게 되었다.
난 아는 게 사실 없구나.
그렇게 요가의 경전들을 보고, 요가의 세계로 조금씩 발을 들이면서 조금 더 겸손해졌다. 그리고 뭔가에 대해 아는 척했던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충격이 '아쉬탕가 요가'라는 것을 접하면서 일어나는데, 그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쉬탕가 요가 시퀀스를 화면상으로 봤을 때, 정말 너무나도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냥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클릭했다. 그 자세들은 모두 내가 아는 자세들이었고, 요가에서 취하는 자세들이었다. 별로 어려운 포즈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정적으로 보여서 클릭해서 따라 하는 한 시간 동안 나는 의문에 휩싸였다.
왜 이렇게 힘든 거지?
정말 이상했다. 전부 내가 할 줄 아는, 한 번씩은 다 들어보고 해 봤던 자세들이고 된다 싶어서 시도해 봤던 것인데 이상하게 선생님 구령에 맞추어서 하자니 헉헉대고 땀이 나며, 평소 잘할 수 있는 자세조차 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차투랑가- 업독으로 이뤄지는 빈야사는 내 팔과 어깨를 부숴버릴 듯하게 힘들었다. 나는 평소 잘하던 시르사사나를 하지도 못했고, 선생님 구령에 따라가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왜 이렇게 힘든고 하니, 모든 것이 맥락이었다. 하나의 포즈를 여유롭게 하자면 그리 할 수 있겠지만, 이 과정은 뭔가 다른 체력과 근력을 내게 요구했다. 거기서 다시 한번 나는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보고 판단하는 것과 내가 해보고 정말 느끼는 것의 차이를.
그 이후로 나는 내가 행해보지 않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쉽게 판단 내리는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내 몸이 그것을 쉽게 체험해 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쉽다고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몸과 나의 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요가를 통해 진정한 이타심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역지사지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따라붙어야 하는데, 오롯하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의 삶의 서사가 아닌 상대방의 삶의 서사를 가지고, 그 상대방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삶의 역사'를 가지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상담 심리학의 기본 전제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상대방의 '몸'이다.
나의 몸과 상대의 몸은 다르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나와 상대의 삶의 역사가 다르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요가 수련을 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요가의 외형적 부분, 즉 '취해진 자세'에 집중하여 다리가 얼마나 찢어졌는지, 허리는 얼마나 굽혀졌는지, 손가락이 발가락에 닿는지 등에 신경을 쓰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요가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의 감각이 무엇을 느끼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몸에서 모두 다를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진정한 이타심으로 가는 출발점이라고 느끼고 있다.
단순한 것을 반복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내가 요가에서는 똑같은 시퀀스를 반복하는 것을 즐긴다. 왜냐하면, 매번 같은 외형의 동작이지만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활동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매번 똑같은 동작들을 반복하는 것이 굉장히 의미 없어 보이고 지루했었다. 하지만, 그 반복적인 동작들을 통해 내가 이뤄내는 성과는 굉장했다.
움직이는 명상
보통, 명상이라 하면 가만히 앉아서 정신적인 활동으로만 무언가를 바라보고 집중하는 '영적인' 그 무언가를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가장 깊은 명상을 움직이는 아사나 동안에 한다. 내 몸을 움직이는 그 순간, 내 근육에 집중하는 그 순간에 나는 과거도 아닌,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만을 살 수 있다. 물론 동작들이 익숙해지면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나를 덮치곤 하지만, 그것 또한 안정된 시퀀스 안에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허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의 몸 구석구석을 느끼고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시간이 나에게는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유일한 순간들'이다.
그렇게, 요가는 나에게 겸손과 이타심과 현재에 있는 능력을 가르쳐왔다. 물론 '단순한 스트레칭'에서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로 발전하기까지는 수많은 수련의 시간들이 있기에 가능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할 테지만, 가끔 '요가는 스트레칭이잖아요, 다른 근력 운동을 하세요' 라든가 '요가를 하시니 유연하시겠어요'라는 말들을 들을 때면, 이 섣부른 오해들을 빨리 깨 주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것 또한 그대로 두는 것이 요가적인 것임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요가에 대한 오해 #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