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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다 알지 않아?

by 반고

은호가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여 구경하러 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드럼을 배운 은호는 그동안 꾸준히 밴드 활동에 참여해 왔다. 입으로 ‘쿵띠따띠’를 외우며 작은 손으로 연습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드럼 스틱이 부러질 정도로 세게 연주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공연은 정말 멋졌고 음악도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에서 펼쳐진 모습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행사 시작 전에 담당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고, 행사 부원들은 무대로 올라오라는 방송을 했다. 학생 열 명 정도를 일렬로 세우고, 축제를 준비하느라 수고한 학생들에게 큰 격려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강당에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사이로, 뒷줄에 있는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은호가 행사 부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순간 작년 이맘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은호는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다. 나 역시 걱정했지만, 은호 자신이 무엇보다 힘들어했다.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았다. 은호에게 어떤 활동에 속해있는지 물어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공동아리, 학년별 프로젝트, 밴드부, 배구부 정도? 해커톤 대회는 한 한기에 한 번 나가는 거고. 지금은 1학년이라 이 정도고 2학년 때는 행사부와 학생회 일을 할 거야.”

이처럼 많은 활동을 하면서 시험공부에 충분한 시간을 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야”라고 조언했다. 무언가 줄이긴 줄여야겠는데 무엇을 고를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밴드를 그만하라고 했다. 합주는 연습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데다가 드럼 연주자가 부족해서 은호가 다른 학년 곡도 도맡아 연주하는 상황이었다. 아들은 한참 망설였지만 1학기 성적표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결단을 내린 듯, 알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가입하지 않은 행사부는 시작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은호는 짧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고, 축제에서 본 은호는 밴드부는 물론 행사부로도 활약 중이었다. 사실 밴드부를 다시 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은호를 데리러 학교에 갔을 때, 아들이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 밴드부 회식 있어서 다 같이 버블티 주문했어.”

‘마지막으로 합주한 게 7월인데 11월이 되어서야 뒤풀이를 하나?’ ‘요즘은 탈퇴한 회원도 회식에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며칠 후, 학교 홈페이지에서 밴드부의 교내 버스킹 사진을 발견했다. 드럼을 열심히 치는 은호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까, 모른 척할지 고민하다 금요일이 되었다. 집에 온 은호가 먼저 말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학업에 쓸 시간이 부족하여 밴드부를 중단하기로 했던 은호는 2학기 중간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면 다시 밴드를 할 만하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만둔 적이 없었던 걸까? 나는 은호에게 밴드 활동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아들이 한 학기라는 시간과 곤두박질친 성적표를 수업료 삼아, 해야 할 일과 하고픈 일 사이의 균형을 배웠다고 믿기로 했다.

축제를 구경 간 덕분에 나는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은호는 공동 MC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푸쳐핸썹!’을 외치며 청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이런 걸 하고 싶어서 행사부에 들어간 거였나 싶기도 했다. 활기찬 모습이 좋아 보였지만 밴드부에 이어 행사부까지, 내 앞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하고 뒤로는 다 했다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고 잘하는 아이에게 ‘적당히 하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공연 관람에 집중하지 못하고, 중간중간 딴생각을 하다가, 밴드부 연주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들에게 짧게 문자를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은호야, 공연 정말 멋졌어. 축하해. 내일 만나자.”

다음 날 집에 온 은호는 목이 쉬어있었다. 과도하게 목소리를 써서 그런 것 같았다. 타이밍이 좋진 않았지만, 나는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를 꺼냈다.

“은호야, 학교에서 밴드부, 행사부 말고 또 하는 거 있니?”

“어. 엄마가 다 알지 않아?”

나와 상의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녀석이 어째서 내가 자신의 활동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 괘씸해 화를 참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런가? 뭐 뭐 하는데?”

이번에는 수박을 먹고 있던 은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배구부, 전공동아리, 학생회.”

점점 짧아지는 아들의 말투에 나도 슬슬 열을 받기 시작했다.

“거기서 네 역할은 구체적으로 뭐야?”

“배구부에선 주장이고, 전공동아리에서는 팀장이고, 학생회에서는 자치회장.”

예상대로, 은호는 참여하는 활동만 많은 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리더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다 그 정도는 해? 아니면 네가 좀 많이 하는 편이야?”

“당연히 내가 많이 하는 거지. 근데 할 사람이 진짜 없어서 내가 나서야 해.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아들의 대답은 이랬다. 학교가 워낙 작고 학생들이 전공에만 관심이 있어서 두루두루 일할 사람이 없다. 축제만 봐도 무대에 설 사람, 기획할 사람 찾는 게 정말 귀하다. 본인이 일을 많이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사람들이 손뼉 치고 웃고 참여만 해줘도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이 아이를 ‘이타적’이라고 부를지,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할지, ‘활력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자기 역할을 당차게 설명하고 앞으로도 조율할 생각이 없는 은호 앞에서 내 양육철학도 마구 흔들렸다.

급기야 은호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꺼낸 말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은호의 태도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한 해에 딱 한 번 있는 축제는 끝났으니, 행사부는 없는 셈 치자’ ‘운동은 꼭 필요한 거니까 안 하는 것보다야 하는 게 낫겠지’ ‘학생회는 리더십을 키우는 일이니까 다른 활동이랑 다르지’... 축제장에서 행사부와 밴드부가 은호에게 얼마나 중요한 활동인지 다시 한번 느꼈기에, 본인이 이 많은 역할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무조건 따르기만 해서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다. 비록 은호가 한때 ‘이 활동은 그만두겠다’라고 말했다가 결정을 번복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은호가 숨기지 말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아서였다. 내가 은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아마 이런 거였을 것이다.

“엄마,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기숙사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움이 있었어. 드럼은 어릴 때부터 하던 거니까 계속하고 싶어. 밴드 연습한다고 공부를 손 놓지 않을 테니 한 학기만 더 지켜봐 주세요.”

아니면 이런 거였다.

“학교에서 바쁘긴 하지만, 시간을 아껴 쓰면서 친구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 그 덕에 좋은 기운을 받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아이를 보면서 그 모습 그대로 환호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쓰러웠다. 일관성 있게 자녀를 키우겠다고 강하게 밀어붙여놓고 막상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딱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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