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1학기를 마친 은호는 드디어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식 날, 나는 짐을 가지러 학교에 갔다. 트렁크와 장바구니, 이불이 든 커다란 봉지를 바쁘게 옮기는 학생들 사이로 아들을 찾았다. 내 앞으로 스무 명쯤 되는 아이들이 지나갔을 텐데, 그중 몇몇은 커다란 봉제 인형을 안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요즘 애착 인형이 이렇게 크구나 싶었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모두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인형들이었다. ‘취향이 비슷한 걸까?’
곧 은호가 나타나서 짐을 챙기고, 친구들과 작별하는 모습을 보니 인형 미스터리는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런데 학교 정문 근처에서 라이언 인형을 든 사람을 또 한 명 발견했다. 이번에는 은호에게 물었다.
“저 인형 들고 가는 사람이 많이 보이는데, 공동구매라도 한 거야?”
은호가 대답하기를, 공동으로 산 건 맞지만 학생들이 산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학교에서 사준 거야. 의자에 놓는 등받이 쿠션이래. 저거 없는 3학년은 아직 실습지를 못 찾은 거야. 좀 슬프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아들은 구직에 성공한 사람에게만 선물을 주는 것이 별로라고 했다. 선배들이 기숙사를 떠나는 날, 인형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뉜다는 게 서글프기 때문이다. 은호 학교의 학생들은 3학년 1학기부터 취업을 준비하고 2학기부터 현장실습을 나간다. 여름방학 이후에는 대다수는 일터로 가지만, 아직 도전 중인 이들은 학교에서 취업 준비를 계속한다.
“엄마, 이제 내 차례야, 내년 봄에는 나도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
나는 무심코 운전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머릿속에 ‘벌써?’라는 말이 맴돌았다. 내 눈에는 3학년 형과 누나들도 모두 어리게만 보였다. 은호는 한술 더 떠 원하는 시기가 따로 있다고 했다.
“되도록 일찍 하고 싶어. 2학기 전에 취업하는 게 대학 수시 합격 같은 거니까.”
아들이 곧 사회에 나간다는 현실이 다가왔다. 마음속에 벌써부터 울렁거림과 불안감이 몰려왔다.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고 떠들썩하게 학교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다음 달부터 회사에 가다니! 그게 일 년 뒤 은호 모습이라는 생각에, 준비가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들이 그런 준비가 되었을까? 나는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었을까?
2학년 2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고, 3학년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빠르게 돌아갔다. 3월에는 기업설명회가 열리고, 4월에는 면접 준비하는 학생이 하나둘씩 생겼다. 나는 은호에게 물었다.
“만약 네가 면접을 본다면, 어떻게 할 거니? 집에 들러서 갈 거야, 아니면 학교에서 바로 갈 거야? 교복을 입는지, 사복을 입는지도 궁금하고, 무엇을 타고 갈지도….”
고등학생의 취업 준비 경험에 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상의할 게 많았다. 은호는 앞뒤 다 자르고 교통편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어떻게 가긴? 버스 타고 대전역 가서, 기차 타고 서울로 가. 그리고 서울역에서 지하철 타고 가는 거지.”
혹시 혼자 가는 건지 물었더니,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했다. 처음 가는 지역이라면 같이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며, “엄마 시간이 된다면 말이야”라고 했다.
얼마 후, 면접일이 다가왔다. 은호와 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고, 광명역에서 내려 수도권 1호선 셔틀 전철로 갈아타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셔틀 전철은 거의 한 시간에 한 대씩 운행되는 열차였다. 운행 시간과 딱 맞아 바로 탑승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세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라 몇 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출발 시간이 지나도 열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KTX 지연으로 선로가 막혀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철 문이 열린 채로 15분 넘게 그대로였다. 면접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출발 소식이 없으면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드디어 셔틀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같이 오길 정말 잘했어. 어른인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데, 은호 혼자였다면 정말 곤란했을 거야.’ 정작 은호는 덤덤한 표정인데,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서울로 향했다.
아들이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다. 과제 시연과 발표 면접을 마치고 세 시간 후, 은호는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잘 끝났다고 했다. 면접에는 네 명의 심사 위원이 참여했고, 공식 일정이 끝난 후 한 명이 점심을 사줬다고 했다. 만약 합격한다면, 상사가 될 분과 식사를 한 셈이었다. 은호는 기술 면접은 그럭저럭 무사히 마쳤지만, 비공식 자리에서는 긴장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야 하는데,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이고, 별로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서 어색했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회사 홈페이지에 있는 사내 동아리 이야기를 떠올리고 물어봤는데, 괜히 했나 싶어서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왜?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한테 ‘팀장님은 동아리 활동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시더라고. 그리고는 ‘뭐, 하고 싶은 거라도?’라고 묻길래, ‘저는 배구를 해요. 혹시 동아리가 있나요?’라고 했더니 ‘구기 종목은 풋살밖에 없던데. 배구는 없는 것 같아요.’ 하시더라고. 그분이 동아리 가입은 자유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너무 늦게까지 모이면 다음 날 힘들 수도 있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럼, 동아리는 퇴근 후에 하는 거예요?’라고 물었는데, 갑자기 팀장님 눈이 커지더니 ‘그럼 언제 하는 걸로 알았어요?’라고 하시더라고. 아차, 내가 뭔가 실수했구나 싶었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은호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동아리를 언제 하는지 알고 있었어?”
“나는 잘 몰랐지. 점심시간에? 학교에는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도 있고, 동아리 활동 시간도 따로 있잖아. 회사도 그런 줄 알았어.”
일부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유대감 강화를 위해 근무 시간에 사내 동아리 활동을 권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직자가 면접 볼 때, 동아리 운영 시간을 묻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은호에게, 초보 직장인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한 질문이고,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최종 면접을 한 번 더 본 후 합격한 은호는 몇 주 뒤에 현장실습을 시작했다. 생애 첫 직장이었다. “내가 들어가서 배구 동아리를 만들어볼까?”라고 말하던 아들에게, 나는 인턴 기간에는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오랫동안 함께 할 조직이라는 확신이 생기면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게 좋다고 조언해 주었다. 어느 날은 동료와 함께 회사 차량을 타고 전시회에 다녀온 후, 은호도 언젠가 자신도 업무상 운전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며, 만 18세가 되자마자 주말마다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면접, 취업, 출근, 운전…. 은호가 하나씩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마다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어떻게 혼자 면접 보러 가느냐고 염려하던 내가, 몇 달 후에는 우리 집 막내인 은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외출할 날을 상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