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준호가 집에 왔다. 입술 한쪽에 물집이 있었는데, 시험 기간에 면역력이 떨어져 구순포진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비타민을 꾸준히 챙기거나 신선 식품을 자주 먹는 것처럼 건강을 지키는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잘 먹어야지, 과일도 좀 사서 먹고 그래.”
“저, 잘 챙겨 먹어요. 기숙사에 과일 유행시킨 사람이 누군데.”
나에게 과일은 쌀, 고기, 채소 같은 건데 과일도 유행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지난번에 쿠팡에서 귤 한 상자 샀잖아. 룸메이트들이랑 손톱 밑이 노랗게 될 때까지 까먹었어. 3일 만에 다 먹은 것 같아.”
집에 있는 귤을 그냥 먹기만 했지, 사 본 적이 없던 아들이 손수 과일을 산 게 반가웠다. 게다가 귤은 까기 쉽고 실온에 둬도 괜찮으니, 냉장고가 없는 기숙사생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귤 다 먹고 룸메 형 어머니께서 샤인머스캣을 보내주셔서 맛있게 먹었어. 앞으로도 돌아가면서 한 번씩 과일 사기로 했어.”
다른 부모님들도 학생 식당에서 먹기 힘든 음식을 챙기는 모습에 격려와 응원의 의미로 과일을 보내셨으리라. 준호가 과일 유행을 주도했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근데 포도를 씻어서 담을 그릇이 없다고 해서 내 접시를 줬지. 우리 방에서 살림 좀 하는 사람 하면 나거든.”
과일을 샀다고, 그릇이 있다고 누구나 살림 고수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네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바로 후회했다. 다행히 준호는 내 말투에 신경 쓰지 않았던지 무용담을 이어갔다.
“일단 나는 과도가 있잖아. 저번에 누가 캠퍼스에서 감을 얻어왔는데 다들 어떻게 먹냐고 그러면서 쳐다보고 있는 거야. 내가 칼로 깎았지. 룸메이트들이 감탄하던걸. 한 번도 과일 깎아본 적 없는 형도 있었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준호를 보니, 내가 살림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이 사는 세상에는 주방 도구가 있고, 그걸 쓸 줄만 알아도 살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준호가 지내는 기숙사에는 복도 끝에 공동 주방이 있다. 학기 초에는 직접 요리를 해 볼 마음도 먹었지만, 식재료 보관이 어렵고 요리 시간이 많이 든다며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한 학기 정도 지나서 사람들이 주방에서 무엇을 만드는지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조리 난이도나 냄새 정도를 알면 준호에게 할만한 요리를 추천해 줄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게 다 달라. 몇몇 부류가 있어, 자주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은 유학생들이야. 서너 명이 모여서 그 나라 고유 음식을 요리해.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이유도 있겠고. 아무래도 사 먹으면 비싸잖아.”
돈을 아끼기 위해서 음식을 해 먹는다는 설명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는 다른 여러 이유를 떠올리고 있었다. 타국에서 밥 먹을 때만이라도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익숙한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주방을 쓰는 또 다른 사람은 준호의 친구로, 끼니와 끼니 사이에 보조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나랑 자전거 타는 친구인데, 그 친구는 과일을 갈아먹어. 구내식당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대. 그래서 냉동 과일을 사서 공용냉장고에 두었다가 방에서 블렌더를 가져와서 셰이크를 만들더라고. 라이딩 후에 그 친구가 해줘서 먹어봤는데, 썩 괜찮았어. 나도 따라 할까 잠시 고민했는데 그냥 말았어. 블렌더랑 과일 사야지, 설거지해야지, 셰이크를 꾸준히 만들어 먹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야. 한번 하고 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
여기까지 듣고 준호가 당분간 조리를 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주방에서 몇 번 만들어본 음식이 있다고 했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뭔데? 뭔데?를 외쳤다.
“라면. 저번에 과 동기 부모님이 파김치 한 통을 보내주셔서 기숙사에 있는 사람끼리 끓여 먹었거든. 진짜 최고였어. 파김치랑 라면이 그렇게 꿀조합인지 몰랐어.”
준호가 들려준 이야기 덕분에 아들이 주방과 어느 정도로 친하지 않은지 알게 되어 쉬운 요리 몇 가지를 추천하려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기숙사로 들어갈 때 준호가 가져간 주방용품은 머그잔, 물병, 수저 세트, 칼집이 있는 과도, 납작한 접시, 국그릇, 미니 도마, 작은 냄비였다. 여름 방학을 보내고 가을학기 짐을 쌀 때는 필요 없는 것들은 두고 가겠다며 시리얼용 국그릇 하나만 챙겼다. 짐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들은 혹시 모르니 좀 더 챙겨야겠다며 마지막으로 과도와 접시를 다시 넣었다. 이렇게 최소한으로 가져가니 준호 같은 사람 네 명의 주방용품을 모아도 과일 담을 그릇이 귀할 정도의 단출한 방이 된다.
먹기 편한 신선 식품에 관심이 많은 준호가 최근 감탄한 음식이 있다. 바로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다. 마음에 들었는지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다음번 내 차례가 오면 이거 사야겠다.”
나는 음식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살림의 시작이라며 아들에게 ‘살림남’이 맞다고 인정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