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2학기가 중반을 지나자 준호의 화두는 늘 군대였다. 언제 갈 것이냐, 어떤 군대에 갈 것이냐를 찾아보고 고민하길 반복했다. 다행히 기숙사에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이들이 있어 육해공군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어본 준호는 공군과 카투사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육군과 해병대 중에 후자를 골랐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 준호와 나는 기숙사에서 짐을 빼서 준호의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한 학기 동안 지낸 살림을 정리해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꽉 찬 일정인데, 우리는 두 곳에 들리기로 했으니 마음이 바빴다.
먼저 준호 학교에서 가까운 외갓집에 갔다. 나의 아버지는 방학이라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얼굴 보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며칠 뒤에 해병대 훈련소가 있는 포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해병대였기에 손자의 소식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준호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고민하던 아버지는 쓸모없어 보이는 훈련도 다 쓸 데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훈련소 처음 들어가서 좌향좌 우향우만 하니까 세상 쓸데없는 데 시간을 쏟는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런 단순한 동작이 쌓여서 나중에 옆자리 동료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게 되고 소대를 하나의 움직임으로 단결시켜 주더라.”
곧 입대하는 사람에게 동료, 단결이란 말이 와닿았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해병대는 준호처럼 스스로 선택해서 가는 이들이니 군 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볼 뿐이었다.
이어서 준호의 친가로 갔다. 평소 말수가 없으신 시아버지는 당신이 최전방 장교로 근무할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준호는 건강하게 잘 다녀오겠다는 말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안심시킨 후 지금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했다. 나는 아들의 사려 깊은 제안에 감탄하며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가족들이 옷매무새를 만지는 동안 준호가 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와 다시는 사진 찍을 기회가 없을까 봐 그런 걸까? 할아버지가 당분간 자신을 만나지 못할 테니까 보고 싶을 때 꺼내 보시라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만에 하나 군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도 준호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불길함이 밀려왔다. 군대에 간 사람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제대하기 마련인데, 마치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가는 것처럼 갑자기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시아버지께서 준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군대에서 힘든 일 겪다 보면 눈물이 날 때가 있을 거야. 나도 모르게 저절로 흐르지. 눈물이 나거든 참지 말고 흘리면 된다. 그럼 지나갈 거야.”
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한 조언은 의외로 감성적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준호가 말을 이었다.
“엄마, 룸메 형이 해병대 나왔잖아. 그 형이 해준 얘기가 있어. 3S만 챙기면 된대. 3S는 sound, sense, speed의 약자인데, 교관이나 선임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센스 있게 행동하고, 뭐든지 빨리하면 된다는 의미래.”
“군대에서 그런 걸 강조하는구나. 왠지 다른 데서도 통하는 얘기 같네? 빠릿빠릿하고, 남 이야기 잘 듣고, 눈치 빠른 사람은 어디에나 필요하니까.”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너무 조용하길래 옆을 흘깃 쳐다봤다. 밤새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시험을 보고, 후다닥 짐을 챙기느라 피곤했던지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불안을 잠재우는 말을 떠올렸다. ‘자유가 주어질 때 자기 몫을 잘하던 사람이면, 군대 가서도 잘 헤쳐나갈 것이다’. ‘군대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특별한 문화와 규칙이 있을 뿐이다.’
이십 대부터 팔십 대까지 군대 선배들의 비결을 들은 준호는 며칠 후 머리를 깎고 훈련소로 떠났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나서 준호를 보러 갔다. 해병대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받기 전에 수료식을 여는데 이때 가족을 초대할 수 있다. 극한 훈련을 마친 병사를 축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족과 동행한 군인들이 부대 밖에서 자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엄격한 통제하에 군사 훈련을 받은 아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이날을 기다렸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수료식이 끝나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병사를 찾아간다. 가족을 만난 군인들은 긴 구호를 외친다.
“필승! 신고합니다. 이병 이준호는 2024년 1월 25일부로 수료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울음이 나왔다.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기에 흘릴 수 있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꽃다발을 건네고, 준호를 힘껏 안아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띄엄띄엄 얼음처럼 서 있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고를 받아줄 방문자가 없는 이들이었다. 겨우 눈물이 멎었는데, 다시 눈물이 났다. 이런 줄 알았으면 꽃다발을 더 가져올 걸, 일일 부모가 되어 부대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밥을 사주면 좋으련만 등등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나중에 들으니 포항에 거주하는 선배 해병들이 수료식에 혼자 있는 병사들과 식사를 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맹추위를 참으며 수료식을 관람한 우리는 예약한 장소로 이동했다.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카페가 있는 곳이라 준호의 복귀 시간 전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테이블에는 인원수대로 숟가락과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인데도 준호는 젓가락을 손에 쥐더니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숟가락인데 앞이 포크처럼 생긴 포카락을 썼거든.”
식기를 간소화하면 빨리 먹을 수 있고, 소지하기도 쉽고, 설거지도 간단할 것이다. 사용법을 처음 배운 아이처럼 허공에서 젓가락을 움직이는 준호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군사 훈련 중에는 식사 도구도 바뀐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올라갔다. 집에서 준비해 온 간식을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았더니 사장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과일, 과자, 젤리 등 여러 가지 음식 중 준호가 제일 먼저 집은 것은 배였다. 아들은 몇 주전 집으로 보낸 군사우편에다 군대에 있으니 배가 제일 생각난다며, 면회 올 때 꼭 가져와 달라고 적었다.
방금 양껏 식사를 마친 아들이 손이 바쁘도록 배를 집는 모습이 신기했다. 말없이 과일을 다 먹은 후 준호가 배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진짜 희한한 게, 편지 쓴 다음 날인가 점심에 배 한 조각이 나온 거야. 그날 디저트로 과일이 나오고 부식으로 몽쉘이 나왔어. 음식 나눠주는 사람한테 몽쉘 대신 배를 더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잡담한다고 혼났어.”
식당 줄에 서 있을 때도 자유로운 대화가 오갈 수 없다니, 이런 게 군기인가 싶었다.
“근데 다른 사람하고 바꿔 먹었어. 옆자리에 앉은 사람한테 배 좋아하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맛은 봐야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너 그거 한입 먹고 나머지 나한테 주라. 대신 몽쉘 가져.’ 하고 얻었지.”
준호는 어릴 때부터 빨대나 컵처럼 입이 닿는 물건을 공유하지 않았다. 가족들끼리도 “한 입만~” 하는 법이 없었다. 동생이 “형아, 나 한 입만” 하면 단칼에 거절하거나, 먹던 걸 통째로 주고 돌려받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누군가 베어 먹은 음식을 챙겼다니 의외였다.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거라도 감사하게 먹었지. 엄청 맛있었어.”
몇 주 사이에 비위가 좋아졌다고 해야 할지, 융통성이 생겼다고 해야 할지, 조금은 무던해진 아들을 보며 군대 가면 사람이 바뀐다는 게 이런 말인가 싶었다. 아들은 원하는 걸 알아차리고, 상황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것 같았다. 준호가 해병대를 선택했을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나고 보니 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