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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지지가 필요한 건데

by 반고

준호 손가락에 물혹이 생겨 수술하기로 했다. 수술 날짜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엔 아들이 대전에 내려와 치료를 받은 후에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병원에서 상담을 받더니 수술이 끝난 후에도 외래진료를 더 받아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동행하고 이후에는 혼자 서울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대학 생활을 위해 집을 떠난 아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나에게 와달라고 도움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병원 로비에서 만난 준호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제부터 소화가 안 되어 식사를 걸렀다고 했다. 보호자인 나도 긴장되는데 수술을 받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었다. 손가락에 생긴 결절종은 통증은 없지만, 그냥 두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여 제거하는 것인데, 꼭 이 시기에 수술하는 게 맞을까, 금방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등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의료진은 이런저런 검사를 한 후 수술 시간까지 대기하라며 아들을 병실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병원 침대와 의자 하나, 옷장이 있었다. 손가락 수술이라, 누워있을 필요까진 없었는데, 쉴 데가 침대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갔다. 환자복을 입고 이마에 팔을 얹은 채 누워있는 아들을 보니 꽤 아픈 사람 같았다.

“이럴 땐 집이 아니고 기숙사로 돌아간다는 게 좀 마음이 그래.”

준호가 말문을 열었다.

손톱만 한 부위를 다루는 작은 수술이지만, 모든 수술은 두렵기 마련이다. 마취가 풀리면 수술 부위가 아플 건데, 옆에서 살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음날 일정이 있어 수술이 잘 끝나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외할머니댁에서 자고 갈래?”

네 명이 한방을 쓰는 대학교 기숙사보다야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았다.

“거기 가면 뭐 해? 아무도 없다며. 난 정서적 지지가 필요한 건데.”

말을 꺼내면서도 좀 머쓱하긴 했는데, 역시나 반응이 별로였다. 부모님이 여행 중이셔서 준호가 외갓집에 가도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 나도 하룻밤 자고 갈까?”

“그건 안되지. 엄마는 엄마의 일이 있잖아.”

그렇긴 하다. 집에는 나를 기다리는 다른 일들이 있다. 당일 퇴원하는 간단한 수술이라기에, 나는 하루 일정으로 서울에 온 것이다. 일단 수술 후 경과를 보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후 수술팀장님이 병실로 찾아와 수술 절차에 대해 자세히 일러주었다. 아들의 눈에서 걱정을 읽은 팀장님이 말했다.

“혹시 사랑니 뽑으셨나요? 이번 수술의 마취 정도나 수술 규모는 사랑니보다 훨씬 간단하다고 보시면 돼요. 수술하는 동안 헤드폰으로 음악을 틀어주니까 편안한 마음이 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등학생 때 겪은 발치보다 덜 힘들 거라는 설명 덕분인지 준호의 염려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팀장님은 곧바로 아들을 수술실로 데려갔다.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병원 근처에서 식사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어제부터 빈속인 아들과 죽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수술을 마친 준호가 병실로 걸어 들어왔다.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나는 수술 부위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퇴원 절차를 마친 후, 약국에 갔는데 아들이 배가 몹시 고프다고 했다. 좋은 사인이었다.


나는 준호에게 400m 쯤 걸어가면 죽집이 있는데, 거기까지 걸을 수 있겠는지 물었다.

“엄마, 나 약지 한 개 빼고는 정말 멀쩡해. 짐도 들고 갈 수 있어.”

아들은 내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달라고 하더니 엄지와 검지에 걸고 힘자랑을 했다. 집에서 챙겨 와 달라고 부탁했던 자신의 테니스화였다. 수술하기 전에는 도로 가져가라더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잘 끝나서 다행이네. 이제 좀 홀가분해?”

“음, 생각보다 괜찮아. 손가락 보호대도 있고, 수술했다는 느낌도 없고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기숙사로 돌아가기 싫다던 준호는 전복죽 한 그릇을 비우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떠났다. 준호가 학교 근처에서 미용실을 찾았다거나 체육관을 등록했다고 할 때는 아무래도 가까이에 있는 곳이 이용하기 좋겠지 하고 별생각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병원을 정하는 건 달랐다. 지속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준호가 다니기 편한 곳이어야만 했는데, 그곳이 내가 사는 지역과 다르다는 게 이상했다. 아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바뀐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우리의 거리를 실감했다.

긴장이 풀린 아들이 일찍 잠들었을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가 자기 전에 문자를 남기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준호가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이제 마취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어. 엄마,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성인이 되었어도 가끔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할 텐데 아들에게 정서적 지지를 충분히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수술이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감사함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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