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8
준호를 만나러 연평도에 다녀왔다. 아들이 있는 부대는 방문객이 있는 병사에게 방문자 숙소에서 면박할 수 있게 해 준다. 처음 ‘면박’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사람을 앞에 두고 꾸짖는 행위인 ‘면박을 주다’가 떠올랐는데, 면회 외박의 줄임말임을 알고 거부감이 없어졌다. 사용 횟수나 시기 등 기준이 있을 테지만, 아들은 입대 후 면박을 신청한 적이 없어서 원하는 기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인천항에서 출발한 배는 두 시간을 달려 대연평에 도착했다. 혼자 섬에 들어간다는 게 긴장이 되었던지 계속 배가 아팠다. 나는 중년이 되어 이런 걸 경험하는데, 함께 승선한 군인들은 이미 겪었다고 생각하니 이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선착장에서 만난 준호는 짐을 들어주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저도 휴가 갈 때 엄마가 방금 온대로 이것저것 타고 집에 가봤잖아요. 쉽지 않은 여정이지요.”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내가 챙겨간 것은 비타민, 텀블러, 음식이었고, 아들이 요청한 것은 운동화와 인식표였다. 그간 군대에서 제공하는 신발을 착용했는데 이제부터는 본인이 산 러닝화를 쓸 거라고 했다. 인식표는 아들이 집으로 주문한 것이다. 실은 군번줄이 필요한 거였는데, 군번줄만 따로 살 수 없어서 인식표까지 샀단다. 부대 안에서 보급품 대신 싸제(?) 운동화를 신는 점이나 군인 인식표를 인터넷에서 주문할 수 있다는 점이나 희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알아서 잘 사용하겠지, 생각하며 부탁받은 대로 들고 왔다.
면박 동안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단체생활에서 벗어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쉬다가 부대에 복귀하는 게 계획이었다. 연평도가 처음인 사람과 부대 밖을 자유롭게 다닐 기회가 없던 사람이 차를 빌려 돌아보기로 했다. 방향, 지형 등 큰 그림에 관심이 많은 준호는 가는 곳마다 “이 길이 여기로 연결되는구나~”하며 신기해했다. 연평도의 주요 볼거리는 안보 관련 시설과 자연경관이다. 입장료를 받는 큰 규모의 관광지는 없지만,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녔다. 바닷가, 함상 공원, 전망대, 충혼탑, 안보 교육장을 방문하고 중간마다 카페, 식당, 도서관에 들어가 더위를 피했다. 마지막에는 군인의 원스톱 쇼핑 장소인 마크사에 들렀다.
운전대에 앉은 아들은 “너무 좋다. 차를 빌린 건 신의 한 수였어요.”라고 말했다.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여가생활이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준호는 전반적인 군대 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했다. 낯선 용어가 들렸지만, 말을 끊지 않았다.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아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는 것이 주어진 시간을 잘 쓰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를 마치며 지금까지 군 생활에서 제일 힘든 게 뭐였는지 물어보았다. 지낼만하다고 늘 씩씩하게 답하던 아들이건만 “엄마가 걱정할까 봐 전화로는 전하지 않았는데, 사실…”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부대 보일러 고장으로 두 달 동안 찬물로 샤워했어요. 진짜 싫었어.”
“어머, 완전 고욕이었겠다! 보일러가 얼마나 하이테크 시설이라고 고치는 데 두 달이나 걸려?”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했다. 시설의 열악함은 짜증 나지만 상처가 남지 않는 불편이다. 군 복무 중인 자식을 둔 부모들끼리 주문처럼 ‘아말다말 무사무탈’이라고 말한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 무탈하게 제대하길! 이란 의미다. 부모들이 염려하는 점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분단국가의 위험과 사람으로 인해 정신과 신체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로 시작한 것 치고는 수위가 높지 않아 아들이 군대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싶었다.
남은 군 생활을 응원하고 돌아오는 배에서 생각해 보니 아들과 둘이 2박 3일을 지낸 건 처음인가 싶었다. 진짜 그런가? 하고 세월을 되짚어보다가 한 번 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준호를 출산하고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2004년도에 태어난 아들을 보러 2024년에 면박을 다녀왔으니 딱 20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