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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Sep 19. 2024

닭발 먹고 위장에 구멍난 맵찔이

45. 범계역 정든닭발

맵찔이였다. 나도 그랬고, 그녀도 그랬다. 우리는 몇 년을 사귀었지만, 매운 음식점에는 안 갔다.


당연히도 아쉽진 않았다. 가고 싶은데 못 가는 게 아니라, 애당초 원하지를 않는 걸.


하지만 인생은 늘 의외다. 그 날따라 우리는 미쳤었다. 저녁 메뉴를 고르는데, 뭐에 홀렸는지 둘이 입을 모아 닭발을 외쳤다.


뻘건 닭발.

매운 닭발.

범계역 정든닭발.



범계역 2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젊음의 거리. 그 풍경 속 적당히 오래된 건물의 좁은 입구를 지나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면 시트지가 발린 반투명 유리문이 나온다.


딸랑- 하는 종소리에 어서오세요-. 매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었지만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리도 널렸겠다, 대충 가운데 어드매에 앉아서


"저희 닭발 2인분 주세요"


매운 걸 늘 즐기는 사람인양, 당당히 주문한다.


"...근데 여기 덜 맵게 되나요?"


비록 몇 초도 가지 못 한 당당함이었지만 말이다.


닭발집 알바생은 미안한 듯 대답했다.


"저희는 초벌도 다 되어 있는 거라, 맵기 조절은 따로 안 되시는데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먹어야지.


그래,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매운맛데이트인데, 뭐 매워봤자 얼마나 맵겠어.


"네네, 그냥 주세요. 괜찮아요."



구워나온 닭발은 그렇게 푸짐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손님이 직접 불에다 익혀먹는 방식이 아니라, 수분이 싹 빠진 채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닭발은 꺼멓도록 뻘갰다. 직화로 구워냈는지 군데 군데 검정 그을음도 묻어있었다. 거북이 등껍데기처럼 길이 쩍쩍 갈라진 두꺼운 발껍질이 매서웠다.


서빙된 위생장갑을 끼고, 우리는 동시에 닭발을 베어물었다. 야무지게. 한 입. 와앙.


"오, 뭐야. 생각보다 괜찮은데?"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일까. 매운 음식의 대명사인 불닭발은 생각보단 훨씬 덜 매웠다.


잠깐만. 이거 사실 우리가 매운 걸 못 먹는 게 아니었나? 알고보면 매운 음식을 대단히 잘 먹는 사람들인데, 먹어버릇 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능력을 몰랐던 것인가?


"오?"


하며 두 입쯤 더 먹는데,


"어...?"


왔다. 살짝 느즈막히. 그러나 묵직하게.


그러더니 순식간에 빠르게. 매운 맛은 정신 없이 미뢰를 타격했다.


"와....."


쓰라리도록 두껍게 부은 입술을 타고, 말갛게 물근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쓰읍... 하..."


예정에도 없던 주먹밥을 시키고,


"하.. 씁..... 쿨피스 하나만 주세요.... 쓰읍...."


쿨피스도 시키고,


"아, 여기.. 씁... 큰 그릇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씁...."


급기야는 큰 그릇(?)을 하나 얻더니,


"저히 자리 여기 구석으로 좀 옴길게여, 제성함니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자리도 옮기고(??),


꼴꼴-


물통에 있던 식수를 큰 그릇에 붇고서,


철퍽 철퍽-


닭발을 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아직 이갈이도 안 한 애기가 김치를 씻어 먹듯, 둘이 합쳐 반 백 살인 남녀 둘이서, 멀쩡하게 영업하고 있는 매운 닭발집에서, 닭발을 하나 하나 물에 씻어 먹었다.


지들도 창피한 건 아는지, 굳이 구석 자리로 옮겨가며 말이다.


생수에 씻겨 허여멀건해진 닭발은

그래도 매웠다.



응급실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난 데 없이 응급실이다.


닭발을 먹고난 다음날이던가. 배가 살살 아프다가, 평소와는 달리 통증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아프다가, 결국 너무 아파져서 주말을 못 넘기고 응급실에 갔더니만,


이게 웬걸.

배에 구멍이 났단다.


매운 건 쥐뿔도 못 먹는 맵찔이가, 무리해서 매운 걸 먹었다가 위장 벽까지 뚫려버린 거다.


게실염에 이은 천공이라던가. 닭발만으로 배가 뚫렸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쨌든 닭발 먹고 이렇게 된 건 명백한 팩트였다.


송충이는 뽕잎을 먹으면 안 되고,

누에는 솔잎을 먹으면 안 되고,

맵찔이는 매운 걸 먹으면 안 된다.


어울리지 않는 걸 먹으면,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면,


배에 구멍이 뚫린다.

탈 난다.



매운 닭발 정복기는 보란 듯이 실패했다. 일부러 구석진 곳을 찾아 앉았지만, 닭발을 씻다가 여러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손님들은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신기한 표정을, 종업원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떨까. 혹시 헤어진 옛 연인과의 매운 닭발 정복기처럼 보란 듯이 실패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맵찔이는 매운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나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닐까.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찾아온 회의감.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깨달음. 1년차에 탈출로를 찾아 헤매다가, 만 2년만에 본부를 떠나 지사를 돌아다니고, 다시 또 복귀한 지 2년만에 우울 장애에 걸려 질병휴직. 그리고 또다른 지사로 나와 여기서도 우울증.


거진 마흔 가까이 먹고 직장이 힘들다며 징징대는 꼴이 스스로 참 추해서, 이제 일이 힘들다고 불평불만하지 말아야겠다고 맘 먹은 지 고작 1년이 채 안 됐는데, 지금 내 몸은 어떤가. 맘이 망가져서 몸이 망가지고. 빼빼 마른 아내에게 매달리고. 울고.


닭발에 구멍난 배처럼.


구멍난 배를 타고 대해를 항해하는 것 같다. 뚫린 데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 표류하는 배. SINKING DOWN.


나는 잘 살고 있나.

가라앉고 있지는 않나.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지는 않나.


범계역 닭발이 생각나는 건

오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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